족보의 글로벌화 ! 이젠 인터넷 전자족보시대입니다
-강릉유씨족보실장 유찬종-
성씨기원과 족보편찬의 유래
동양(東洋)에서의 문자를 창제하고 처음으로 성(姓)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입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름(地名)이나 산의 이름(山名), 강 이름(姜名) 등을 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이를 살펴보면 5000여년전 신농씨(神農氏)는 강(姜)씨 성을 가진 부락의 한 두령이였는데 그의 어머니[母]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씨(姜氏)라고 하였고, 그가 140년간 즉위 한 후 통치 지위는 황제(黃帝)가 이어 갔는데 이때 황제(黃帝)의 어머니(母)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씨(姬氏)로 하였고, 삼황오제(三皇五帝)신화 가운데 오제의 마지막 군주인 순(舜)의 어머니(母)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씨(姚氏)로 하였다는 기록들이 이것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사적에 나타난바와 같이 고구려의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씨(高氏)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인 재사(再思)에게 극씨(克氏), 무골(武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默居)에게는 소실씨(小室氏)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오고, 백제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扶餘)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扶餘氏)라고 하였으며, 신라는 박.석.김(朴.昔.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때 육도(六部 ; 六村)에 사성(賜姓)하여 양부(梁部)에 이씨(李氏), 사량도(沙梁部)에 최씨(崔氏 ; 유사에 鄭氏) 점량부(漸梁部)에 손씨(孫氏), 본피부(本彼部)에 정씨(鄭氏 ; 유사에는 崔氏), 한저부(漢??部 )에 배씨(裵氏), 습비부(習比部)에는 벽씨(癖氏)의 성을 사성(賜姓)하였다고 하며,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은 황금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 진흥왕 시대에 건립한 진흥왕의 네 곳의 순수비와 진지왕 三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와,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인명(人名)을 보면 성을 쓴 인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으며, 우리말로 된 이름 뒤에 그 인물의 본이라 할 수 있는 소속부명(촌명)을 써왔음을 알 수 있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유리왕 때 육부에 사성(賜姓:성을 하사함)한 것이 사실이라면 상부는 李(이)씨, 소상부는 崔(최)씨, 본피부는 鄭(정)씨 등을 써야 할 것인데, 성을 쓰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육도(六部)의 사성(賜姓)은 진평왕 이후라고 추정되며, 이로써 우리나라의 선조는 성보다 본(本)을 먼저 썼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여하간에 이러한 기록들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이후 우리나라가 성(姓)을 사용함에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이을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가 성(姓)을 사용하게 된 것은 중국문화가 유입한 뒤에 사용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며, 고려 문종9년(1055)에는 성을 붙이지 않은 사람은 과거급제를 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법령이 우리나라 성의 한 획을 긋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일반인들에게 까지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거의가 다 각자의 시조를 기준점으로 하는 성을 쓰게 되는 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춘추전국시대 제후의 나라인 삼한(三韓) 이래 한민족(韓民族)은 사승(史乘-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이 있고 집안에는 가승(家乘-혈통적 근원 내지 내력을 직계조상을 중심으로 하여 밝힌 가계기록)이 있으니 그 유래가 오래도록 전해오는 바, 한국의 족보는 국제 학계의 주목과 평가를 받고 있는 인류 문화사의 한 章節(장절)이라 하겠습니다.
족보의 진화!
사승은 민족의 생성발전(生成發展)의 자취를 기록한 충(忠)의 이념의 체계이고 가승은 성족파별(姓族派別)과 문벌계보(門閥系譜)를 수록(收錄)한 효(孝)의 理念(이념) 체계이니 가승과 사승은 종혼(宗魂)과 국혼(國魂)을 담은 그릇으로서 종인(宗人)과 국인(國人)의 충효교본(忠孝敎本)의 샘이요 뿌리이므로 한민족은 일찍부터 종사(宗史)와 국사(國史)에 지대한 관심을 기우려 이를 편찬하고 보존 발전시켜 오는데 힘써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위대하고 빛나는 유산으로서 오늘에 이르렀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계승되어 온 사승과 가승의 기록문화에도 이제 새로운 변화로의 진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즈음 와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변화는 족보의 디지털화입니다. 우리가 흔히 족보라고 말하는 것은 옛 부터 전해오는 한지에 실로 꿰맨 고서적 형식의 한자족보를 떠올리게 되었으나,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한글 족보가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양장본으로 컬러 사진을 곁들인 족보가 등장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지만, 인쇄물이란 점에서 큰 틀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근간에 들어 급변하는 미디어 매체 환경을 배경으로 족보의 형태와 문화도 환골탈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CD로 만들어진 전자족보는 클릭 하나로 영정, 선산 사진, 생전에 찍은 동영상 등을 바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검색 기능을 갖춰 이름만 알면 복잡한 족보를 들추지 않아도 해당자를 쉽게 찾을 볼 수 있도록 편리하게 제작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마져도 수정편집에 있어서 책 족보의 단점을 벗어나지 못 함으로서 실시간적인 업데이트가 불가능하여 실시간적인 열람을 할 수 없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족보입력 프로그램을 통해 각 문중에서 족보 내용을 직접 입력하여 전산화하고 수시로 교정 편집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인터넷족보 시대로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나아가 스마트 폰으로도 조상이나 가족을 검색해 볼 수 있는 족보 개발과 함께 스마트폰용 모바일족보도 활발하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족보를 만들고자하는 각 문중에서는 전통 책 출판족보 제작비용의 3분의 1 수준인 저렴한 전자족보 제작에 수요층이 쏠리고 있는 추세입니다만, 그러나 시중의 인터넷족보 운용형태를 분석해 보면 대부분 업체에서 어느 문중의 데이터를 수집 입력 교정 편찬하여 업체의 관리로서 인터넷족보가 운용된 형태입니다. 이는 업체가 문중을 대신해서 족보업무를 대행해줌으로 문중에서는 관리비용(사용료)만 지불하면 됨으로 관리상 편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프로그램의 소유권이 문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업체에 있기 때문에 차후 사업성과에 따른 업체의 운명에 따라 인터넷 족보의 존폐에도 크나큰 영향이 걸려 있음으로 장기적 안목으로 신중을 기해 선택해야 할 사항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위험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입력편집 출력 프로그램을 각 문중의 소유로 개발하여야 합니다. 이는 초기 투자비가 업체에서 운영해 주는 현행 전자족보 제작비와는 차이가 있으나 모든 프로그램 소스와 데이터가 문중의 소유이기 때문에 의뢰했던 운영업체가 파산하더라도 다른 업체에 의뢰해서 운영하던지 아니면 문중에서 직접 운영할 수 있는 안전함이 있습니다.
강릉유씨 인터넷족보의 등록현황과 전망
우리 강릉유씨 인터넷족보는 초기투자비가 좀 많이 소요되긴 했지만 모든 소유권이 우리 대종회가 갖도록 계약을 체결하고 족보제작을 추진하고 있으며, 전국 20여만 명의 종친을 대상으로 2010년 3월부터 사업을 계획하고 2010년 6월부터 제1차 등록목표를 10만 명으로 하여 사업을 수립하여 2011년 10월 현재 약 3만여 명의 종친들이 참여한 가운데 활발하게 진행중에 있습니다.
현재 우리 강릉유씨 인터넷족보 진행현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입력대상 총 20여만 명중 19만 여명이상이 입력완료 된 상태이며, 이중 등록대상(생존자)을 통계청 2000년도 인구조사 통계 18만 여명이고, 이중 족보에 등재된 생존자수는 78,000여명으로 이중 2011년 10월 현재 등록완료된 종친은 3만 여명으로 등록율이 38%에 이르고 있습니다.
계파별 10월 현재 시조님 이하 총 입력현황을 보면 파시조님 이상 상계 1,883명과 ①경력공손 72,718명 ②병사공손 46,931명 ③좌랑공손 31,162명 ④군수공손 26,461명 ⑤어사공손 7,603명 ⑥병판공손 5,828명 ⑦감찰공손 1,195명 ⑧금성군손 778명 ⑨부사공손 410명 ⑩호판공손 153명으로서 총 195,122명으로 남자가 152,225명, 여자가 42,897명 입니다.
특히 해외로 이주하였거나 유학이나 파견중인 종친들의 관심이 높은 가운데 글로벌시대의 인터넷족보로서 면모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어 현재 진행중인 작업이 완료되고 향후 새롭고 세련된 모습으로 완성된 인터넷족보가 활발하게 운용되면 최소한 10년 이내에 전 세계에 흩어진 우리 강릉유문이 모두 참여하는 유씨인터넷대동보가 마련 될 수 있으리라 예상하며 더 나아가서는 지구촌 곳곳에 산거하는 한고조(漢高祖)의 후예 유씨(劉氏) 혈족들이 하나의 인터넷족보로 참여하여 세계적으로 대동단결할 수 있는 계기가 실현되리라는 기대와 사명감으로 편찬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제 영정(嬴政)이 사망한 후 혼란했던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등장한 한(漢)나라, 이때부터 문자(한자)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활발한 기록문화가 성행하게 됨으로서 국가경영 전반에 걸친 번영과 부흥을 이룩하게 되는데, 이 한(漢)나라를 세운 분이 바로 중국 문명의 원형이자 우리 유씨(劉姓)의 시조이신 한 왕조의 창업 황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선조님 이십니다.
우리 유가(劉家)들은 이렇듯 자랑스런 황제(皇帝)의 후예로서 자긍심을 갖고 자신과 가족의 이름을 종사에 길이 남길 수 있도록 모두가 인터넷족보에 관심을 갖고 빠짐없이 등록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선조님들과 미래의 후손들에게 까지 우리의 뿌리가 단절되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올바르게 자신을 되찾고 이를 길이 남기어 후세에 영원토록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2011. 10. 해천재 족보실에서
고황제 70세 /도시조 31세 /강릉시조 23세 -유찬종(劉燦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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