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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劉 門中

문희공 유창 묘역(文僖公 劉敞 墓域)

문희공 유창 묘역(文僖公 劉敞 墓域)

유창신도비

▒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6호

▒ 지정연월일 : 1995년 1월 25일

▒ 시 대 : 조선 헌종 12년(1846)

▒ 규 모 : 신도비 1기(基), 전체 높이 240㎝, 비신 높이 142㎝, 너비 53㎝, 두께 33㎝

묘갈(墓碣) 1기, 문관석 2기, 망주석 2기, 보호면적 19,651㎡

▒ 재 료 : 화강암

▒ 소 유 자 : 강릉유씨대종회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 190

조선 초기의 문신 유창(1352∼1420)의 신도비이다. 유창의 본관은 강릉, 자는 태화(太和)이다. 초명(初名)은 경(敬)이었는데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따르면 태종 13년(1413) 개명한 것으로 적혀있다. 또 초자(初字)는 군의(君義)인데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에 실린 그의 자설(字說)에는 맹의(孟義)로 되어있다. 본관은 우계현(羽谿縣)인데 우계는 옥당(玉堂)이라고도 하며 뒤에 강릉부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는다.


유창은 1352년 지안악군사(知安岳郡事)를 지낸 유천봉(劉天鳳)과 교동전씨(喬桐田氏) 성무(成茂)의 따님 사이의 4남 가운데 큰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고려의 학자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따님이다. 17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20세에 대과(大科)에 올랐으며, 성균관 좨주(祭酒) 등을 지냈다. 1392년 7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오르고 성균관 대사성 산기상시(散騎常侍)·중추원 부사를 지냈고 옥성군(玉城君)에 봉해졌다. 1397년 이후 대부분 문한직(文翰職)에 종사하여 성균관 대사성, 직수문전(直修文殿)을 시작으로 문형(文衡) 6번, 예문관 충편수관(充編修官), 제학 ,대제학 2번, 보문각(寶文閣) 학사제학 4번, 대제학 4번, 대사성 2번을 지냈으며, 때로 수문전 제학을 맡았다. 이밖에 잠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맡았고, 1413년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었으며 1416년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평소 온유하고 돈후(敦厚)한 성격으로 스스로를 선암(仙菴)이라 호(號)하면서 세상명리를 초연히 버리고 늙도록 청직(淸職)에 머물렀다. 유학과 시문에 뛰어나 이색(李穡)·성석린(成石璘)·정탁(鄭擢) 등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1368년 이색에게 ≪서경(書經)≫을 배웠고 1371년 이색이 지공거(知貢擧)였을 때 시의(詩義)로써 대과에 합격했다. 또 조선 태조 원년(1392)에는 성균관 대사성이던 그와 내사인(內舍人) 유관(柳寬)을 번갈아 입직시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의토록 하였으며, 또 태종 13년(1413)에는 고려의 종실 왕휴(王休)의 아들이 민간에 살아있음이 밝혀지자 왕씨를 살려두겠다는 태종의 뜻을 받들어 인정(仁政)을 베풀게 하였다.


1420년 12월 9일 69세로 사망하자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희(文僖)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당시 광주(廣州) 구천면(龜川面) 해천리(蟹川里) 오른쪽 산록에 묻혔다.

그의 묘 입구 좌측에는 헌종 12년(1846)에 세운 비가 전한다. 네모받침돌 위에 네모기둥 모양의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기왓골을 새긴 덮개돌을 얹었다. 비문은 판의금부사 이광정(李光正)이 지었고, 전 형조판서 이의익(李宜翼)이 썼으며, 두전(頭篆)은 진잠(鎭岑) 현감을 지낸 14대손 유석(劉錫)이 썼다.


유창 (劉敞)

【성 명】 유창(劉敞)/유경(劉敬)

【생몰년】 ?∼1421(세종 3)

【본 관】 강릉(江陵) 유(劉)

【자·호】 맹의(孟義), 선암(仙庵)

【시 호】 문희(文僖)

【저서·작품】 《선암집(仙庵集)》

【시 대】 조선 전기

【성 격】 문신


?∼1421(세종 3). 강릉 유씨의 시조로 초명은 유경(劉敬), 자는 맹의(孟義), 호는 선암(仙庵)이다. 지군사 유천봉(劉天鳳)의 아들로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강릉부 우계현(羽溪縣)에서 태어났으며, 공민왕 20년(1371)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 학유가 되었다. 박사, 통례문 지후, 예의 정랑, 군부 정랑, 호조 의랑,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개창할 때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으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거쳐, 태조 3년(1394) 옥성군(玉城君)에 봉하여졌으며, 태종 1년(1401) 승녕부 윤(承寧府尹)으로 소요산에 들어간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하였으며, 1408년 태조가 죽자 참지의정부사로 수묘관이 되어 3년간 능을 지켰다. 1410년 길주도 찰리사 등을 지낸 뒤, 1413년 세자 이사(世子貳師)가 되고, 1416년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세종 3년(1421) 궤장을 하사받았다. 저서로 《선암집(仙庵集)》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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