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내륙순환관광도로, 단양 - 충주
바다가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바다를 볼 수 없는 곳, 충청북도는 남한강 유역으로는 석회암 동굴이 많고 죽령, 조령의 높은 산과 계곡에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 많은 지역이다.
댐을 막아 인공적으로 조성한 드넓은 충주호와 충주호반을 따라 구비 구비 돌아나가는 내륙관광순환도로가 잘 조성되어있어 접근성과 볼거리가 고루 갖추어진 곳이라 하겠다.
30년 가까운 세월 저편 언젠가 중앙선 열차를 타고 단양 역에 도착하여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도담 삼봉과 고수동굴 등을 돌아본 적이 있다.
그 다음에도 우리나라 내륙지방이라는 위치답게 국도를 이용하여 남쪽지방을 여행할 때에는 단양이나 충주 중에 한 곳을 들려서 관광지도 찾아보고 충주호반 길 드라이브도 즐길 수 있는 좋은 코스 중의 하나로 생각해 왔다.
그러던 곳이 생활이 더욱 편리해져 터널이 뚫리고 복잡한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우회도로와 고속도로가 생긴 다음부터는 먼발치에서 스치듯 지나다니던 곳이 되었으니 빠른 접근성의 편리함 대신에 지나가는 길에 들린다는 우연성은 없어진 셈이다.
지자체마다 관광지 개발에 힘을 쏟은 만큼 많이 변해있을 단양과 충주를 다시 돌아보자 작정을 하고 인터넷에서 자료도 알아보고 코스도 정하고...
내륙순환관광도로는 빼어난 경관을 갖추고 있는 충북의 관광지를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충청북도에서 1997년부터 5년에 걸쳐 기존국도와 지방도로를 연계하여 만든 도로이다.
단양군 영춘에서 영동군 학산에 이르는 297km의 도로는 속리산, 소백산, 월악산의 3개 국립공원을 지나며 보은에서 괴산을 거쳐 충주에 이르는 140km의 계곡 길과 월악산 송계계곡, 충주호를 바라보며 달리는 호반 길, 단양팔경, 영춘의 온달관광지까지 많은 볼거리와 휴식처들을 만나게 해준다.
그 중 영춘에서 충주에 이르는 길을 달리는 도중에 죽령 옛 고개를 넘어 희방사계곡과 폭포를 보고오자는 계획을 세웠다.
▶ 단양군 영춘의 온달관광지
중앙고속도로 북단양 IC를 나가 단양 읍에서 빨간 교각이 예쁜 고수대교를 건넌 다음 좌회전하여 영월 쪽 59번 국도를 달린다. 군간교를 지나서 우회전하여 남한강을 끼고 달리는 고씨동굴 방면의 595번 지방도를 가다가 다시 다리를 건너 우회전하여 구인사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 온달관광지이다.
다리를 건너자 수해로 인해 도로가 유실되어 공사 중이라 천천히 달리면서 연개소문 세트장의 화려한 모습 뒤쪽 산봉우리를 쳐다보니 산꼭대기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성벽이 조그맣게 보인다.
미리 알고 찾아보기 전에는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이다.
삼국시대에 단양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곳으로 한강을 차지하려는 고구려와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이 이곳에서 무예를 단련하였고 신라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전설에 의지하여 이름 지어진 온달산성과 온달동굴 등을 연계하여 관광지로 개발한 것이 온달관광지이다.
지자체마다 만들고 있는 단양군 캐릭터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이다.
드라마 "연개소문" 당나라 세트장
당나라 세트장은 단양군에서 50억을 들여 4,200여 평의 부지에 만든 야외 세트장으로 화려한 위용이 멀리에서도 눈에 띄어 온달관광지 찾기가 쉬울 뿐 만 아니라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수도 있겠다.
드라마에 나오는 수나라와 당나라 황궁과 정문, 수당시대의 귀족이었던 이밀, 이연, 양현감 등 주요 인물들의 저택이 지어져있고 낙양성문을 비롯하여 수당거리와 시장거리들이 재현되어 모두 47동의 건축물이 지어졌다고 한다.
이궁의 정자, 수련이 가득한 연못들이 아기자기한 모양으로 배치되어있어 연못 난간에 걸터앉아 당나라에 온듯한 기분을 낼 수도 있고 황궁 마당에는 죄인을 문초하던 형틀도 있어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도 있다.
드라마에 출연한 탤런트들의 실물 판넬들이 서 있는 곳, 당나라 황제가 타던 수레, 여러 가지 필묵과 황궁과 저택을 장식했던 도자기와 그림들, 생활도구들을 보며 수당시대 역사관을 둘러보는 느낌도 들곤 한다.
문경의 드라마 "왕건" 세트장에서는 돌로 쌓은 담이나 벽들을 두드려보면 목재 판넬의 소리가 울려 실소를 머금곤 했었지만 이곳 세트장은 건축물 자체를 사실 그대로 튼튼하게 쌓아 영구적인 건물을 지어놓았다.
한쪽에서는 수해로 피해 입은 곳들을 보수하는 작업이 한창인 것을 보며 적지 않은 입장료(어른 5,000원)이긴 하지만 유지문제도 걱정이겠다 싶었다.
온달장군이 쌓았다는 온달산성
세트장 뒤쪽에는 세트장의 연장인 것처럼 지어진 온달산성으로 오르는 입구가 있다.
온달산성은 전설처럼 전해오는 온달장군의 무용담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본디 언제 축성되었는지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삼국시대의 유물이 성안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삼국의 영토확장이 치열하던 시대에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신라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해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이 단양의 캐릭터가 될 정도로 고장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조선 초기에 이미 산성의 역할을 상실한 옛 성으로 기록된 온달산성은 남한강을 굽어보는 해발 427m의 성산 위에 길이 972m, 높이 3m의 반원형 석성으로 산봉우리를 빙 둘러싼 퇴뫼식 산성이며 사적 264호로 지정되어있다.
산과 계곡, 강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던 이 곳은 산성이 있는 꼭대기까지 900m 정도라고 하여 별 생각 없이 산성 입구를 들어서서 잘 조성되어있는 계단을 쉬엄쉬엄 오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계단이 끝나자 시작되는 산길은 경사가 급하고 길이 좁은데다가 물러가기 아쉬워하는 더위가 한여름을 방불케 하여 흘러내리는 땀이 흥건하다.
중간쯤에 있다는 사모정에서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과 당나라 세트장을 내려다보며 시원한 산바람, 강바람에 흩어지는 커피 향을 즐기고 나서 시작부터 너무 강행군을 하여 지치면 곤란하다는 핑계를 만들어 산을 내려왔다.
사모정자리는 신라군의 화살에 전사한 온달장군의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평양성에서 달려온 평강공주가 눈물로 달래어 움직이게 했다는 곳이라는 말이 전해진다고 하지만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은 서울의 아차산성이라는 학계의 주장도 있고 성안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신라의 것들이라서 산성자체가 신라시대에 쌓은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6.25 때 주민들의 피난처였던 온달동굴
천연기념물 제 261호인 이 동굴은 온달산성 아래에 있어서 온달동굴이라 부른다고 한다.
약 4억 5,000만 년 전부터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온달동굴은 주 굴과 지 굴의 길이가 760m인 석회암 천연동굴이다.
동굴의 입구가 남한 강변에 있어서 홍수로 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물이 잠기기도 하는 동굴은 지하수도 풍부하여 동굴 밑바닥에 물이 흐르고 작은 연못 같은 물웅덩이가 곳곳에 있으며 지표수의 유입으로 항상 1m 정도의 물이 흐르고 있어서 계속 물소리가 들려온다.
1966년부터 학술조사가 시작되어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일반 공개가 시작된 동굴 높이는 5-10m, 폭 5m 가량으로 석순과 종유석이 잘 발달되어있고 사계절 평균 14-15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입구에서 하얀 헬멧을 쓰고 들어가면 비교적 넓은 관람로가 잘 만들어져있고 조명도 잘 되어있어서 아름답게 흘러내리거나 기묘한 모양을 하고 있는 종유석들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
2층, 3층으로 오르내리며 종유석의 장관을 위에서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웅장한 모습이 있는가하면 허리를 굽히고 기어들어가다 시피해도 천정에 헬멧이 부디 치곤하는 낮은 곳을 통과하면 다시 넓은 공간에 화려한 종유석의 장관이 펼쳐져 있다.
몸을 돌려 비집고 들어갈 듯 좁은 곳을 통과하여 계단을 오르고 한바퀴 돌아 나오면 다시 주 굴과 연결되는 등 아기자기함과 재미도 즐길 수 있다.
시원한 동굴 속에서 보물찾기처럼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니 사모정까지 오르기도 힘겨웠던 피로가 싹 가시는 듯 하다.
동굴 밖 한쪽에 만들어놓은 산성의 모형을 돌아보며 산성 오르기를 대신하고 가파른 산정을 두르고 있는 온달산성을 바라본 후 단양으로 향하였다.
▶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단양팔경
단양에 있는 여덟 곳의 빼어난 풍광을 단양팔경이라고 부른다.
수만 장의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과 반석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이 폭포를 이루고 있고 흰색의 바위가 층을 이루고 있어서 넓은 바위와 심산유곡의 절경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재광이 선암(仙岩)이라 불렀다 하는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이 1,2,3경이다.
남조천 개울 옆에 우뚝 서있는 사인암(舍人岩)이 4경,
남한강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장엄한 기암괴석의 형상이 거북같이 보이는 구담봉(龜潭峰)이 5경,
희고 푸른 바위절벽이 대나무 죽순처럼 힘차게 솟아 있다하여 옥순봉(玉筍峰)은 6경,
남한강 상류의 강 가운데에 있는 세 봉우리 도담삼봉(嶋潭三峰)이 7경,
바위에 구멍을 뚫은 듯 아치모양을 이룬 석문(石門)은 8경,
모두 여덟 곳을 말하는데 그 순서가 달리 기재된 자료들도 있다.
요즈음은 소백산 자락의 죽령폭포, 남한강 주변의 석회석 동굴, 온달 산성을 포함하여 단양군 내의 절경들을 신 단양팔경으로 소개하는 등 단양군에서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선조, 단양군수로 부임했던 퇴계 선생이 수려한 단양의 풍광에 반하여 돌아보며 단양팔경을 정하였는데 그 중 옥순봉은 청풍면에 속하였다고 한다.
청풍군수를 만나 옥순봉 지역을 단양군에 넘겨주기를 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옥순봉 석벽에 단양동문(丹陽同門)이라 새겼다고 한다.
퇴계의 단양사랑에 감동한 청풍군에서 옥순봉을 단양 쪽으로 넘겨주어 단양팔경이 완성되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정도전의 호가 유래된 도담삼봉
온달관광지에서 단양으로 돌아와 고수대교를 건넌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직진하면 도담삼봉에 이른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남쪽 여행을 할 때면 오가는 길목에 있어 잠시 쉬어가곤 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입구에서 주차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다.
가운데의 높이 6m의 장군봉을 남편바위라 부르고 왼편의 작은 봉우리를 첩봉, 오른편의 중간 크기의 봉우리는 아들 낳으려고 첩을 얻은 남편이 미워서 딸을 안고 돌아앉은 처봉이라는 말이 그럴 듯하다 싶어 보이던 형상은 장군봉에 있는 삼도정 정자 아래까지 들어찬 물 탓에 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삼도정 정자는 정도전이 지었다고 하며 정자에서 보는 풍광이 수려하여 단양군수로 있던 퇴계선생이 이 곳에서 지었다는 시도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정선군에 있던 삼봉산이 홍수에 떠내려가자 정선군 사람들이 찾아다니던 중 단양군 남한강 한가운데 흙이 쓸려나가고 바위만 남은 삼봉산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정선군의 명산을 단양군이 소유하게 되었다고 매년 단양군에서 정선군에 세금을 내게 되었다.
세금내기를 억울해 하던 어른들을 대신하여 조선조 개국공신 정도전이 소년시절에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오라한 것도 아닌데다가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수 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따진 다음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정도전의 호, 삼봉도 이 봉우리에서 따 온 것이라고...
남한강변의 자연아치, 석문
주차장에서 언덕으로 오르는 옆에는 야외노래방 음악분수가 있다.
98년 5월부터 가동된 분수는 7억여 원의 사업비를 들여 만든 것으로 최첨단 컴퓨터그래픽방식으로 노래를 부르면 음정에 따라 36가지의 다양한 모습의 물줄기가 뿜어진다고 하는데 1곡당 2,000원이고 메들리 곡은 1만원이라고...
다양한 물줄기를 뿜는 분수가 곳곳에 설치된 요즈음, 분수구경하자고 남의 취향 따라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들여야 하는 일도 난감하지만 주차료 내고 들어와서 관광하고 있는 사람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돈을 지불한 사람만 즐기면 된다는 식으로 운영하는 행태도 한심한 발상이라 생각된다.
물속에서 뿜어지는 분수가 아니라 언덕 한쪽에 만들어놓은 분수는 노래가 끝나고 물 뿜기를 그치자 더욱 썰렁해 보이고...
300m 가면 있다는 석문을 보기위해 음악분수 옆의 계단을 오르면 이향정 정자가 있다.
남한강 쪽에서 먼발치로나 볼 수 있었던 석문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은 것도 지자체의 덕분이라 생각하며 정자 앞에서 남한강 가운데 자리 잡은 도담삼봉, 강 따라 구비치는 길과 강 건너 평화롭고 한적하게 보이는 마을의 모습도 돌아본다.
정자를 지나자 남한강을 내려다보며 석문으로 향하는 길과 산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 길을 택해 내리막길을 잠시 걸으면 자연이 만들어놓은 천연아치 석문이 내려다보인다.
큰 규모의 돌로 된 아치는 위쪽 돌기둥의 굵기도 대단하고 돌 위에 자라난 무성한 풀과 숲을 이룬 주변의 나무들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아치사이로 남한강의 조용한 물결, 저녁햇살을 받은 강 건너 마을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이고...
하늘에서 살던 마고할미가 물을 길러 내려왔다가 비녀를 잃어버리자 그것을 찾으려고 흙을 파서 99마지기의 논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석문 아래쪽 왼편에 있는 작은 굴속에 보이는 옥전이라고 한다.
주변 경치에 반한 마고할미가 계속 이곳에 살면서 농사를 지어 하늘나라 양식으로 쓰였고 술, 담배를 좋아하던 마고할미는 죽은 후에 술병을 들고 긴 담뱃대를 들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파른 절벽 길에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길은 좁아서 발아래가 조심스럽고...
석문과 주변 경치만 감상하다가 돌아섰다.
명필들의 친필이 각인되어 있는 사인암
도담삼봉에서 단양으로 들어와서 단양읍을 통과하고 상진대교를 건너서 풍기, 영주방면으로 직진하면 대강면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으로 길을 잡아 사인암 표지판을 따라가니 휴가철이 지나 찾는 이도 없는 민박집이나 작은 식당들이 있는 작은 마을이 나오고 남조천 개울 건너로 우뚝 솟아있는 사인암이 있다.
70m의 높이 위에 소나무 숲을 이고 있는 큰 바위절벽 옆으로 낮게 이어지는 바위절벽들, 절벽 위로 울창한 숲이 있고 비가 많아서 생긴 곳곳의 작은 폭포들, 사임암 아래를 제외하곤 깊어 보이지 않은 넓은 남조천이 한데 어우러져서 절경을 이루고 있다. 겹겹의 바위가 포개져 있는 것처럼 그물 무늬가 들어있고 엷은 갈색과 녹두 색이 군데군데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바위틈을 비집고 자라는 소나무의 모습으로 꽃 병풍을 연상케 한다.
단양출신인 고려 말 학자 우탁이 이곳을 자주 찾아 즐겼다 하여 그의 벼슬이름을 따서 사인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남조천에 걸린 다리를 건너 사인암으로 가면 고려 공민왕 때의 나옹화상이 지었다는 청련암이 있고 청련암을 지나 사인암 바로 아래 바위 위에는 학교 때 배운 우탁의 탄조가가 새겨져있다고 한다.
"한 손에 막대잡고 한 손에 가시들고 /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단릉 이윤영이 은거하기도 했던 사인암에는 전서체에 능했던 당대의 명필 이인영의 글씨와 이윤영의 글들이 새겨져 있다하여 서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골고루 찾아보는데 7시간을 소비하였다는 글을 본 적도 있다.
여행지에서 바위에 새겨진 글을 볼 때마다 못마땅했던 터라 아무리 명필이라도 훼손된 바위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남조천 건너편에서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인암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글을 남겨 후대에 전할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텐데...
▶ 소백산 희방폭포와 희방사
다음날 아침, 단양에서 상진대교를 건너 풍기 쪽으로 방향을 잡아 사인암 입구와 중앙고속도로의 단양IC 입구를 그냥 지나쳐 달린다.
단양 I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죽령터널을 통과한 후, 다음의 풍기IC에서 내려가 죽령 쪽으로 거슬러오는 방법도 있지만 바쁠 것도 없는 여행길이기에 아침의 좋은 공기도 즐길 겸해서 죽령고개를 넘기로 하였다.
이른 아침이나 소나기라도 내린 후에 죽령고개를 넘을 때면 자욱한 안개로 무섭기까지 했던 곳이건만 오가는 차량이 없어 한가한 길에서는 엷게 낀 안개조차 여행길 운치를 돋구어주는 듯하다. 잠시 멈춰 서서 차곡차곡 겹쳐있는 완만한 산의 능선들과 울창한 수림사이로 흐르는 안개도 보아가며 오르다보니 어느새 죽령 휴게소이다. 산에 오르려는 사람들의 차량과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들만 보이는 한산한 휴게소 끝에 세워진 “이제부터 경상북도”라는 이정표 아래를 지나 구불구불 돌아내려가다 보면 중턱쯤에 희방사 표지판이 있다.
예전에는 국도에서 꺾어지는 도로 초입에 검문소가 있었지만 동해안 철책선도 걷어내는 화해무드가 이곳도 변화시켰는지 건물만 남았고 뒤쪽 계곡입구에는 숙박업소와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소백산의 자랑거리, 희방폭포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오르며 차창 문을 내린다.
시원한 아침 공기, 돌 틈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녹색의 푸르름에 몸도 마음도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주차장(주차료 4,000원)을 지나서 다시 잘 정비된 길을 달려 매표소 앞의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국립공원 입장료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여 사찰관람료와 분리했건만 희방사 같은 경우에는 등산객들도 모두 희방 폭포와 희방사를 지나서 올라가는 것을 보면 공연히 복잡하게만 만든게 아닌지...
소백산 국립공원 등산로 안내판에 의하면 희방사에서 천문대까지 2.4km 거리에 1시간 30분, 천문대에서 비로봉까지 4.4km 거리에 1시간 45분으로 표시되어있다.
20년여 전, 단풍이 곱던 저녁 무렵에 죽령고개를 넘다가 잠시 들려 폭포만 보고 돌아갔을 때는 검문소의 군인은 있어도 주차료나 입장료가 없었던 듯...
매표소(입장료 2,000원)를 지나 울창한 숲, 바위 틈새로 흐르는 계곡 물소리, 큼직큼직한 돌들이 계단처럼 이어진 산길을 올라 폭포를 향한다.
엷게 흐르는 안개가 것치고 무성한 잎들이 아침햇살에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무렵 물소리가 점점 커져서 쉬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발길을 재촉한다.
계곡을 가로질러 걸려있는 아치형 철다리를 건너면 높은 절벽을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발 700m에 위치한 높이 28m의 희방 폭포는 내륙지방에서 가장 높은 폭포이고 영남 제1의 폭포라고 한다.
"소백산 영봉의 하나인 연화봉에서 발원하여 몇 천 구비를 돌아서 흐르다가 이 곳에서 한바탕 천지를 진동시키는 장관이 넋을 잃게 하여 조선시대 석학 서거정 선생이 天惠夢遊處(하늘이 내려주신 꿈속에 노니는 곳)이라 읊으며 감탄했다고 한다."
소백산 국립공원 희방 폭포 안내문의 글이다.
폭포가 떨어지는 계곡은 다른 곳보다 좁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가을의 짧은 해에 어두컴컴하고 무섭기까지 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던 곳이다.
다시 찾은 폭포는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반짝이는 물보라,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아래로 쏟아지다가 중턱에서 살짝 꺾여 숨을 고르고 다시 쏟아지는 폭포의 모습은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적셔주는 느낌이다.
바닥이 어딘가 싶게 진초록 색을 띈 소(沼) 옆의 물가에 앉아 살랑대는 바람에 땀을 들인 다음 폭포 옆 절벽에 만들어놓은 철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른다.
폭포 위로 올라서면 폭포 아래쪽 소와 내리꽂히는 폭포의 물줄기, 바위와 돌 틈 사이를 흘러 아래로 내려가는 계곡물, 걷히는 안개너머로 햇살 따라 싱싱한 느낌을 더해가고 있는 건너편 숲들이 모두 우리 차지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에 섞여 바위틈 덤불 속에서 수줍은 듯 작게 우는 풀벌레소리도 들린다.
한여름의 목청껏 울어대는 매미소리와는 달라서 '지금 아무리 더워도 가을이 오고 있구나.' 깨우쳐주는 소리다.
폭포 쪽으로 급하게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뒤로 하고 산 쪽을 바라보면 희방사의 단청 한쪽이 보인다.
호랑이 설화가 전해오는 희방사
폭포를 올라서면 탁 트인 넓은 계곡이고 맞은편 산 아래로 희방사가 있다.
소백산 기슭 해발 850m에 자리 잡은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무운대사가 세운 절이다.
무운대사가 소백산 토굴에서 수행 중에 밖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리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살펴보니 여인네를 잡아먹은 호랑이의 목에 비녀가 걸려있었다.
무운대사가 호랑이 목에서 비녀를 빼내고 "산속에 먹을 것이 많은데 하필 사람을 해쳤느냐?"고 야단을 쳤다고 한다.
얼마 후 산돼지를 물어오자 "나보고 육식을 하란 말이냐"고 호통을 친 얼마 후에 대사에게 어느 양가집 규수를 물어다 주었다고 한다.
놀란 무운대사가 알아보니 경주호장의 무남독녀였다고...
금지옥엽 무남독녀를 잃고 시름에 잠겨있던 호장은 무운대사에게 은혜를 갚고자 산세가 좋은 이 곳에 절을 지어주고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이 돌아와 기쁘다는 뜻의 기쁠 희(喜)와 두운선사의 참 선방이라는 상징으로 방(方)을 써서 희방사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6.25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53년에 중건한 사찰 건물이 지금의 희방사이다.
희방사 전면은 계곡을 가득 메울 듯 커다란 승방이 가로막고 있어서 폭포 쪽에서 올라오면서 볼 때에는 갑갑한 감이 있다.
여러 사찰을 돌아보면서 보제루나 만세루 같은 건물 1층의 한가운데에 통로를 만들어서 그 곳의 계단을 통해 오르면 대웅전 앞마당으로 들어서게 되는 형태를 많이 보았는데 그런 모양의 건물이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승방 옆의 돌계단을 오르니 정면에 대웅보전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연륜이 짧은 건축물이라 문화적 가치를 말하기 어려워서인지 대웅보전이나 삼존불, 지장전 등에 대한 해설 안내판이 없어서 불교나 사찰에 대한 상식도 짧고 불자도 아닌 우리들은 준비한 자료를 참고하여 돌아본다.
지금의 대웅보전은 새로 지어진 것이고 오른쪽 작은 다리를 건너 높다랗게 앉아있는 지장전이 옛 대웅전이라고 한다.
대웅보전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협시보살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라고 하지만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삼존불 왼쪽에는 천불을 모셔놓은 듯...
삼존불을 모신 대웅보전 왼쪽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26호인 희방사 동종이 있는데 원래는 충북 단양 대흥사에 있던 것으로 대흥사가 폐사되면서 옮겨온 것이라고...
충청북도 문화재가 희방사로 옮겨와서 경상북도 문화재가 된 셈이고 원래부터 희방사에 있던 문화재는 월인석보 판목이라고 한다.
월인석보는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국문으로 엮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세존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책으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1권 머리에 훈민정음 판 15장, 30면이 있어서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하지만 6.25 때 절과 함께 불타고 현재는 월인석보 책판이 보관되어 있다.
대웅보전 앞에서 지장전으로 다리를 건너기 전 약수물로 목을 축인다.
수조 가장자리에 앉거나 누워있는 동자 상들이 어찌나 예쁜지...
대웅전 뒤 언덕 위에는 칠성탱화를 중심으로 산신탱화와 독성탱화를 걸어 봉안하고 있는 삼성각이 있다.
산신 옆에는 호랑이를 그리는 것인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하지만 창건설화를 미루어 두운대사와 호랑이가 연상되기도 하였다.
돌아 나오는 계곡에서는 올해 태어났겠다 싶은 작은 다람쥐들이 바위사이를 오르내리며 장난을 치는 모습에 발길이 더뎌지기도 한다.
속세를 떠나 자연에 묻힌 듯한 이런 모습도 휴일이면 아래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희방사까지 1.7km를 걸어 올라가야 할 지경으로 등산객들이 붐빈다고 하니 몇 시간 동안이라도 산이 들려주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며 산길을 내려왔다.
▶ 충주호반 길을 달려서 충주로...
단양에서 충주까지 약 52km의 뱃길이라는 충주호는 1985년 충주시 종민동과 동량면 사이의 계곡을 막아서 만든 높이 97.5m, 길이 464m 의 다목적댐에 의해 생긴 다목적호수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깨끗한 호수로 꼽히는 충주호는 총저수량 27억 5천만 톤으로 인근 군지역의 생활용수와 농업용수, 공업용수로 쓰일 뿐 만 아니라 충주댐의 완공으로 홍수 시에 한강 수위가 1m 낮아졌다고 한다.
또한 8억4천4백만 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짙은 산림으로 둘러싸인 주변의 계곡과 수려한 경관,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한 유적들도 많아서 내륙 제일의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희방사를 본 다음 풍기I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단양IC로 내려가 단양 읍 쪽으로 향하다가 사인암 입구를 지나쳐 직진하면 충주방면 36번 국도를 타는 이정표가 나온다.
내륙순환관광도로의 일부 구간인 36번 국도는 충주호를 따라 달리는 호반 길로 곳곳에 마련된 쉼터와 돌아서기 아쉬운 절경에 취하여 길을 늦추게 된다.
유람선으로 구담봉과 옥순봉을 돌아보는 출발지 장회나루를 지나 청풍문화재단지 입구도 지나치면 송계계곡과 미륵사지로 통하는 월악산 입구,
모두 몇 년 전에 돌아본 곳이라서 계속 직진하다보면 충주로 향하는 3번 국도를 만나게 되고 얼마 안가서 충주 시내로 들어섰다. 낯설게 변해버린 충주시내에서 충주 역을 왼편으로 보고 지나자 만나는 첫 번째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탄금대공원이 나온다.
충주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탄금대공원
국토 중앙부에 위치한 충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좋은 영향을 받아 발달한 점도 있으나 수로와 육로가 잘 연결된 요충지이기에 삼국이 서로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였던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다.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지점의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때에 가야국의 악성이었던 우륵이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신라에 귀화한 후 이곳에서 가야금을 뜯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고, 조선조의 임진왜란 때에는 신립장군이 왜병을 맞아 사력을 다하다가 전사한 곳이다.
남한강 쪽으로 난 기암절벽과 송림이 우거져서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탄금대 입구 비탈길을 올라 충주문화원 앞에 차를 세운다.
매점 바로 옆에 오석으로 위엄을 갖춰 만들어진 악성 우륵 선생추모비와 조웅장군 기적비가 서 있으나 매점에서 무질서하게 내놓은 조잡한 야외탁자와 의자들 속에 자리하고 있어서 대접이 말이 아니구나 싶다.
탄금대공원안내판 옆에는 음표 모양의 탄금대사연노래비, 뒤쪽에는 야외음악당도 자리하고 있으며 곳곳에 조각들을 배치하여 조각공원 같은 면모도 갖추고 있는 충주의 자랑거리인 탄금대공원 안에서 첫 인상을 그르친 셈이다.
송림사이로 뻗은 깨끗하고 넓은 공원길을 소나무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조각들을 보며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 들어가면 충혼탑이 나온다.
한국전쟁 당시 순국한 충주출신 장병과 경찰관 군속 군노무자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6년 건립한 추모탑이다.
기단에 무궁화 꽃이 새겨져있고 포탄을 상징하여 만들었다는 탑신에는 이승만대통령의 친필로 충혼탑이라 써있다.
좀 더 걸어 들어가면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순절한 신립장군과 팔천 명의 고혼을 달래는 팔천고혼위령탑이 있다.
왜군들이 부산동래에 상륙하여 물밀듯 밀고 올라오자 북방에서 용맹을 떨쳤던 신립장군도 자원하여 유성룡이 모집해준 군관 80여 명 만을 데리고 충주 일대로 내려오게 된다.
내려오는 도중 각지에서 젊은 농민들까지도 모아 8,000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온 장군은 지형적인 여건상 조령과 죽령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조정의 생각과는 달리 조령 좁은 골짜기 산세에서 훈련 되지 않은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휘하 장졸을 이끌고 이곳 탄금대 주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의 무리를 맞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워낙 열세였던 싸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최후를 마쳤다고 하지만 조령에 진을 구축하지 않은 것이 패인이라고 신립장군의 전술을 탓하는 말도 많으나 임진왜란 결과를 볼 때 조령에서 싸웠던들 전과에는 변동이 없었을 듯... 탑에는 전투를 독려하는 신립장군과 몸으로 맞서다시피 하는 농민군의 조각이 있다.
팔천고혼 위령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항일 독립운동가 이었던 권태응선생의 감자꽃노래비가 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일제시대 항일정신이 깃든 동요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없애고 일본천황의 국민으로 삼으려고 창씨개명 강요하자 이에 저항하는 작품으로 1968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새싹회가 세운 노래비이다.
충주에서는 이 곳 출신인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권태응 문학 잔치를 감자 꽃 노래비 부근에서 열고 있는데 지난 6월에 11회 행사를 치렀다고...
감자 꽃 노래비에서 숲 속에 세워진 조각들을 감상하며 걸으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오고 한옆으로 계단이 있다.
1991년 탄금대 지표 조사에서는 탄금대 동북쪽에 축조 연대가 명확하지 않은 토성 터가 발견됐고 구석기 시대의 석기와 민무늬토기, 고인돌 등이 발견되어 복원 중이라고 한다.
언덕 위에서 첫 번째 만나는 것은 육당 최남선이 짓고 일중 김충현 선생이 쓴 탄금대기(彈琴臺記)이다.
충주가 자리 잡은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우륵과 관련된 탄금대의 유래, 충주의 변천사, 신립장군의 순절, 몽고의 침입 때 김윤후의 활약상과 임강수, 김생 등이 예술을 꽃피운 곳이기도 하며 신립과 함께 임경업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라는 등 충주의 지난날을 기록한 충주의 역사 비인 셈이다.
탄금대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에 탄금정과 열두 대가 자리 잡고 있다.
탄금정 2층에 오르면 남한강의 모습이 내려다보이고 우륵과 신립장군을 추모하는 글들이 걸려있다.
탄금정은 충주시 성내동 충주관아 안 연못에 있던 천운정(天雲亭)을 옮겨놓았다가 목조로 된 정자가 낡아서 1976년 다시 지은 것이다.
탄금정에서 남한강 쪽으로 12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신립장군순국지지비가 있어 이 곳이 신립장군이 순국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남한강 절벽 위에 큰 바위가 있는 곳이 바로 열두 대이다.
시야가 탁 트여서 구비 구비 흐르는 강줄기와 함께 남한강 가운데의 용섬 모습이 평화로워 보이는 이 곳이 임진왜란 당시 조총으로 무장된 십수만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와 맞서서 창과 활로 무장한 훈련되지 않은 팔천군사와 최후의 일각까지 활시위를 당기다가 순국한 신립장군의 격전지이다.
열두 대는 가야금의 현이 열두 개 여서 이름 붙였다는 설과 신립 장군이 조총을 든 왜적과 싸우면서 활의 열을 식히기 위해 남한강까지 열두 번을 오르내려서 이름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해서 탄금정에서 열두 대로 내려가는 계단도 열두 개로 만들었다고 한다.
다시 오솔길을 따라내려 오면 1989년 건립한 우륵 선생 탄금대비가 있고 다시 비탈길을 내려오면 1981년에 건립한 충장공 신립장군 순절비가 비각 속에 보호되고 있다.
비각 아래의 넓은 터에 대흥사가 있는데 이 곳이 고려사에 나오는 양진명소라고 한다.
고려사에서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곳을 양진명소(楊津溟所)라 부르고 태종실록에는 충청도의 계룡산, 죽령산과 함께 이 양진명소에 소기(小祈)를 정하고 춘추로 제례를 올렸다고 기록돼 있다.
또 그 옛날 이곳에서 기우제 등 치성을 올리던 굿인 양진명소 오룡굿은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대흥사는 1955년 오법우 스님이 창건한 절로 대웅전과 대웅전 계단 양옆에 석등이 있는데 연화문과 용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하고 중간의 육각 면에는 용과 사자를 빙 둘러 조각하였으며 옥개석의 귀퉁이들이 날렵하게 올라간 모습이 전래되어 오는 사찰들의 그것과는 달리 화려하고 아름답다.
대웅전 옆에는 창건주인 오법우 스님의 부도 탑이 있다.
날씬하게 조성된 9층 석탑 뒤로 쌍 석등과 미륵불도 서 있다.
범종각 밖의 유난히 커다란 목어가 걸려있어 눈길을 끄는 대흥사를 돌아 나와 다시 주차장으로 향하는 계단 중간에는 활을 쏠 수 있는 국궁터도 마련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영토 중앙에 세웠다는 중앙탑
탄금대에서 다리를 건너 우회전하여 중앙 탑 표지판을 따라가면 충주박물관 앞의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에 중앙탑이 우뚝 서 있다.
국보 제6호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인 중앙 탑은 높이 14.5m로 통일신라 때인 8C 후반-9C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통일신라시대 탑으로는 가장 높은 탑이라고 하며 당시 영토의 한가운데를 표시하여 세웠다고 하여 중앙탑으로 불리지만 현재 한반도의 영토로 생각하면 중앙보다는 아래쪽에 위치할 터...
1992년부터 중앙 탑 주변을 문화사적공원으로 조성하여 이 고장에서 출토되고 수집된 각종 유물과 민속자료를 보관, 전시하는 향토 민속자료 전시관과 전국 제일의 수석산지인 남한강에서 채취된 수석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한 남한강 수석전시관이 있다.
조정지 댐과 충주댐 사이의 탄금호의 경치도 좋을 뿐 만 아니라 낚시나 수상레저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찾고 넓은 잔디밭에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충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장소라고 한다.
중앙 탑이 있는 충주박물관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북 충주 IC로 향하는 길에 있는 중원고구려비는 국보 제 205호로 지정되어있다.
국내외적으로 남아있는 고구려비는 길림성 집안 시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 비와 중원고구려비가 유일하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되며 1976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할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고 한다.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 네 면에 모두 글을 새긴 비로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고...
앞과 왼쪽 측면의 일부만 읽을 수 있으나 "고려대왕" 은 고구려를 뜻하며 고구려 관직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과 같은 글자를 찾을 수 있으며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써 있어서 고구려비임을 확인하였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기록해 놓는 등 의미가 크다.
고구려 영토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충주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음을 말해주는 고구려비라고 한다.
1박2일의 짧은 여행으로 충북내륙관광순환도로의 단양-충주 구간을 돌아보고 죽령너머 희방사까지 설렵 했건만 서울로 돌아온 시간은 저녁 전이었다.
사통팔달로 잘 뚫린 도로망 덕분이기도 하지만 인터넷에서 얻어가는 사전 정보는 모르고 스쳐지나가는 일이 없이 골고루 찾아보며 의미 깊은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br> 좋은 여행을 할 수 있게 건강이 오래 유지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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