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국립관광지 수승대 劉氏 선영 참배와 발자취 탐방
경북 국립관광지수승대 관리사무소 좌편 10시 방향 칠팔백 미터 전방으로 보이는 한국유씨의 큰집 거창유씨 선영이 있다. 이곳에는 도시님의 10世 劉覃(유담)선조님 이하 후손들이 함께 모셔져있다.
유 담(劉 覃)
거창인 영계 환의 자, 통훈대부사헌부감찰행용궁현감 청백리이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상4길 83-4
■영사정(永思亭)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남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 창마 423번지
위천면 장기리 423번지 창촌마을의 위천초등학교 어귀에 있다. 조선조 초에 영계 유환(劉懽)이 지어 유영(遊泳)하던 곳이다. 그 후 수백 년 세월에 대를 이어 후손들이 중수하였다.
규모는 목조건물로 와가 3칸이다.
갈천 임훈 역양 정유명 시 원운에 가로되
乎在瀯溪叟(호재영계수) 偸閑臥小丁(투한와소정)
吟詩未作聳(음시미작용) 擧酒眼生靑(거주안생청)
池柳光風㓉(지유광풍활) 庭悟霽月明(정오제월명)
林泉無限景(임천무한경) 慰我傲時情(위아오시정)
영계 좋아 사시는 어른이시여 / 소정에 한가히 누어 계시는 구나 /
읊조림에 잠기시면 지그시 눈 감으셨고 / 술잔을 드신 후 생기 더욱 푸르러라 /
못가의 실버들 광풍에 흔들리고 / 뜰 앞에 오동은 제월에 밝더라 /
임천의 한없는 경치가 / 내 마음을 더욱 즐겁게 위로하네.
영계 유환은 서기 1337년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광정대부밀직사사 겸 대사헌을 지냈다. 조선조 초에 수차에 걸쳐 와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고려왕조를 기리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다가 세상을 떠났다. 전원에 그의 신도비가 있다.
영사정기 역문
내가 서북지방으로 고려의 선죽교에 이르렀으니 선죽교는 곧 정문충(포은 정몽주)이 순절한 곳이다. 지금까지 도피의 흔적이 반근착절(얽히고 설켜 해결하기 어려움)로 남아 있어서 격동에 우러러 강개하여 누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고 돌아오는 이가 없으며, 영남으로 내려와 일선 땅에 이르러 금오산을 바라보니 이 산은 이르기를 길충절(야은 길재)이 은둔생활을 하던 곳이다. 대나무 줄기 푸르고 빽빽하여 방황하고 손뼉을 치며 스스로 알지도 못하게 한숨을 쉬고 오게 된다. 또 남으로 내려와 감음(感陰)에 이르러서 영사정에 오르고 보니 이 정자는 영계 유선생이 자정(숨어살며 의리를 지킴)하던 곳이다. 아! 공이 고려조에서 도헌(대사헌)으로 나라의 운명이 다하는 날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영남으로 돌아와 금원산 아래에 은거하면서 마음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기로 맹세하매 오륜삼강이 우주를 떠 괴일만하고 지조는 별과 달같이 밝고 삼엄하였다.
이 정자를 건축하고 산수의 아름다움 속에서 종적을 감추고 암석의 기록함에 회포를 부치고 처음 일을 변개하지 않고서 남은 해를 마치었으니 예전에 이른바 천년 아래에 고상한 벗이라 함이 공의 이름이 아니겠는가.
공부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은 외롭지 않으나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하시었으니 이 정자에서 두어마장 쯤 가면 달암이 있으니 역시 이참판 인데 그 부인 김씨로 더불어 칠일을 주려서 돌아간 돌이다. 지금에 이르러 백기(몇백년)를 지내도록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이달암이니”하고 있으니 공이 이공의 집에 사위로서 뜻이 같고 의리가 합함으로 일찍이 그 정자에 명을 지어 이르되 “일생을 두중간에서 공경으로 전인의 닦아옴에 복종하여 삼가 오관을 지키고 깊이 삼휴를 생각하였으며 백의를 입은 자가 서로 도와서 계술한다.” 하였으니 전인이 닦던 오관과 삼휴는 모두 옛날의 절의를 숭상하던 사람이고 백의자라는 사람은 곧 이달암을 이른 것이다.
슬프다. 공이 돌아간 후 몇 백년 만에 아무 마을에서 정동계와 같은 절의가 있었고 또 의사와 충신이 있어서 우뚝하고 빛났으니 모두 이 영사정에서 시발점이 되었었다. 영사정의 시의(난리를 당하여 의리를 취함)가 크다 하겠다.
아! 백의(위에 보였음)의 풍도를 들은 자는 완악한 사람도 염치가 있고 게으른 사람도 서게 된다 하였으니 이정자에 올라서 이 명사의 구절을 외운다면 진실로 한말의 창자에 피가 끓어남이 있어서 어찌 격앙하고 강개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 유공과 같은 충의는 실상 정포은이나 길야은으로 더불어 상하가 백중이 될만 한데 후세에 있어서 현달과 어둠의 사이가 있는 자는 어찌함인가? 우리 유공과 같은 철석심장이 아직까지 씻어버린 것처럼 없어지지 않았다가 조금 후일을 기다리어 밝아질 것인가?
대개 산봉우리가 웅장하게 빼어난 것이며 수석이 맑고 깨끗한 것이며 노을과 구름이 아득하게 피어오르며 화초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며 새들이 위아래에서 지저귀고 있음은 역력하게 모두 이 정자에 경치를 폭주하고 있으나 실상은 모두 영사정의 의리가 아니므로 한 가지도 부쳐서 말하지 않고 다만 이르기를 「정자의 뜰에는 추운겨울을 지탱하는 소나무와 늙지 않는 암석이 있으니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이르게 되면 대강 선생의 기질과 다못 풍도를 볼 수 있으리라」고 운운하였다.
한 고을에 반남 박종구는 기문을 지음
본관은 거창으로 자는 국노요, 호가 영계이다. 서기1337년에 출생하였고, 대과에 급제하여 감찰밀직사도헌을 역임하였으며, 공민왕 때는 대사헌으로 특히 나라에 공이 많았다.
선생은 고려 말의 충신으로 나라가 망하자 감음땅 금원산에 들어가 불사 이군하였고, 신계에 영사 정을 지어 은거 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시로 이르되 “잘 있도다. 영계 늙은이는 한가히 정자위에 누워 있도다. 라 하였고, 또한 명에는 ‘천명을 즐기며 분수를 알았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라 하였으니 이는 오직 이 세상의 풍진을 피하며 길이 옛 임금만을 사모한다는 뜻이리라.
영계선생의 불사이군 정신을 일컬어 선비정신이라 한다. 부귀영화가 따르는 벼슬을 마다하고 스스로 깨끗한 지조를 지켜 나가는 정신이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이다.
서기1409년 2월10일에 신계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3이다. 후세에 선생의 충절과 효행을 기려 금계서원에 향사 하였고, 영사정 뜰에 선생의 신도비가 서 있다. 금계서원(金溪書院)은 위천면 강천리 강동마을 동쪽이며 위천천 서편 언덕에 있었다. 서기 1803년에 세워 강천 이예(薑川李芮) 달암 이원달(達巖李元達) 영계 유환(瀯溪劉懽) 확계 정옥견(蠖溪鄭玉堅)을 병향하였다. 1868년 국령에 의해 훼철되어 지금은 없어졌다.
고려가 망하자 영계 유환(劉환)이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켜 1392년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중수해 오다 화재로 소실되고 1890년에 중창했다. '고려의 전왕을 길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영사정이라 했다.
정자 안에는 1938년 후손 한제가 지은 <영사정 중수기>, 장안인 박종구가 지은 <영사정 서>, 1941년 기록한 <종중 찬포사>, 1944년 사량 최훈교가 지은 <영사정 중수기>, 1950년 후손 문옥이 지은 <영사정 중건기>, 1976년 여산 송경환이 지은 <영사정 중수기>, 1966년 완산 이근섭이 지은 <영사정 중수기>가 있고, 16세기 향토 문인 은진 임훈, 팔계 정유명과 해주 오사량, 금구 이현, 서원 곽빈, 문화 류세홍, 안동 권여눌, 은진 임필희의 차운시가 걸려 있다.
정자는 돌계단을 올라 쇠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형태는 팔작지붕에 네 모서리를 활주로 버틴 누각형 정자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뜰로 들어서면 마당 왼쪽에 아름드리 회화나무(홰나무)가 있고, 오른쪽에는 느티나무가 반긴다. 회화나무 뒷쪽에는 1936년에 세운 '영계 유선생 신도비'가 서 있는데 여의주를 문 용머리에 거북이 몸통을 한 귀부가 엎드려 있고, 비신 위에는 용이 뒤엉킨 이수가 얹혔다.
비신의 제일 윗 쪽에 '영계 유선생 신도비'란 전액이 진성 이문구의 글씨로 음각되어 있고, 그 아래 행주 기우만이 짓고, 초계 정연시가 쓴 행서체의 비문이 돌의 앞뒤를 빼꼭이 메우고 있는데 예사로운 글씨가 아니다. 비문은 6.25때 강동 뒷산에 은신해 있던 공비들과 토벌군의 총격전 중에 생긴 탄흔 두어군데 말고는 필치가 뚜렷하다.
정자를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옛날에는 냇가였을 정자 앞에는 집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으며, 정자의 화재로 당시 선생의 채취를 느낄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우나 주위의 대나무 숲은 선생의 높은 절개를 나타내고 있다.
역문
고려 광정대부 밀직사사 사헌부 대사헌 영계 유선생 신도비명 병서
상나라가 주나라로 바뀌는 때를 당하여 두 성을 섬기지 아니하려고 망복의 의리를 지켰던 분에게 내가 선산의 고사리를 캐고 동해의 물로 술을 빚어 그 영혼 앞에 부어 올리고 싶었더니 영계 유공도 그중의 한분이시다. 공의 휘는 환이요 자는 국노라 도첨의 찬성사 견규는 공훈으로 거창군을 수봉하였으니 지금 거창고을이다. 자손들이 거창으로 본관을 삼아 대대로 현달하였다. 고조에 찬은 사온령동정으로 밀직사를 증직 받고 증조에 승은 판전리 상호군이요 조에 해는 진현관 대제학이요 고 흡은 현령이요 비는 기계유씨니 그 아버지는 낭장 백이다.
공은 서기1337년에 출생하셨는데 어려서 총명하고 겨우 말할 나이에 문자를 알았고 효도와 공손히 하는 도리를 태어나서부터 알아서 딴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부모에게 드렸다. 이미 자라서는 큰 뜻이 있어서 사소한 의리를 구애받지 않았다. 이달암의 가문에 장가들었으므로 인하여 그에게 수학 실지 학문을 전공하는데에 부지런하니 달암이 공을 보낼 때 마나 멀리 바라보면서『내가 닦는 도가 남쪽으로 갔다』라고 칭찬하였다. 평소에 경솔한 동작이 없으며 딴 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가난해도 마음만은 태연하였다. 책상위에 항상 소학을 놓아두고 성리의 깊은 뜻을 탐구하였다. 상스럽고 못쓸 소리는 귀로 듣지 않고 이단의 글과 못쓸 빛은 눈으로 보지 않았다. 부모상에 너무나도 슬퍼하였으며 예절도 또한 손색 됨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은 먹지 않고 시묘살이로 삼년상을 마쳤다. 달암공이 칭찬하기를 공은 왕을 보좌할만한 자격자라 하여 과거보기를 권하였던바 한 번에 급제하고 감찰밀직사 도헌을 역임 하였다. 공민왕의 정치가 옮길 무렵에 바른말로 극간하여 정의를 부축한바 많았고 정도를 호위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일로 자신의 책임을 삼았다. 고려가 망하자 감음땅 신계로 들어가 영사정을 짓고 그곳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취지를 시로 이르되 『잘 있도다. 영계 늙은이는 한가히 정자위에 누워 있도다.』라고 하였고 또 명에는 천명을 즐기며 분수를 알았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이곳에서 너그러이 지내면서 이 세상의 풍진을 받지 않고 길이 옛 임금만을 생각하면서 여생을 마칠 것을 맹세한 것이며 수차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도 이를 불고하고 영락기축 이월 십일에 신계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 칠십 삼세라 안의군 동리월현리 임좌에 안장하였으니 즉 영사정 남쪽이다. 선비들이 금계에다가 서원을 건립하여 문질공 달암공 학계공 제현들과 함께 배향하였다. 부인은 강양이씨니 그의 아버지 참판원달이 즉 달암이요 할아버지 예가 즉 문질이라 부인이 이러한 법가에서 생장하였기 때문에 그의 부덕이 공의 부인이 될 만하였다. 공보다 칠 개월 후에 작고하여 공의 묘 우편에 부장하였다. 독신 아들 담은 현감이니 고을사람들이 거사비와 사우를 세웠고 생원 정제안은 공의 사위라 손은 두 분인데 항은 전생서령이요 회는 부사정이며 세 손녀는 현감 노계정 상호군 이보원 사인 이속동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현손이하는 많은 위인들이 있으니 평정공 귀손은 청검하고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며 나라에 대관이 되었고 그 아우 통정영손진사광손 이들 모두가 가법을 지켜왔다. 참봉 관 참봉숙 통덕완 이들은 문행이 모두 높아서 소리쳤고 금오우 참정자인 덕개의 의물에 다투지 않고 세풍을 이어받음과 의사인 명개는 정유재란에 참여하여 부부가 함께 순절함과 교수 후갑의 출천지효에 명리를 떠나고 도가 있음과 녹봉언일의 효행과 학문이 높아서 백세에 사표가 됨은 모두가 공의 유택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아니함임을 알 수 있다. 장차 신도에 비를 세우고저 후손 동환 진엽 병용 등이 함께 나를 찾아와서 종중결의라 하면서 비명을 요구하는 것이며 거듭 말하는 사람은 고을 유림조종술 임필희 신종삼이들이였었다. 내가 극히 늙고 병들어서 감히 남의 집 선조 사적에 손을 쓰지 않으려 했으나 공의 위대하신 유풍과 절의가 사림에 빛나고 또 지금에 세상 풍조가 좋지 못하여 나라의 가까운 신하와 대대로 내려온 신하들이 임금과 나라를 팔아먹는 등 못할 짓이 없는 이때에 선생의 절의로 하여금 세상에 밝힌다면 교화에 도움이 적지 않겠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허락하노라. 명의 도는 충효에 근본하고 행실은 시명에 나타나다 백세토록 먼 느낌은 변두가 이에 향기롭네. 향사하고 축사로 족히 증거 하겠고 강상은 우주를 떠받치고 지절은 성원같이 밝았네. 포은 야은과 비등한 철석같은 그 마음이라. 전날 사람 정확한 평론이니 만고의 강산은 한권의 춘추로다. 만월대는 높았으며 수양산도 좋게 뵈네. 후인들의 노래에서 듣고 알리 월현의 언덕에는 공의 무덤 사척이라 영사정이 있었으니 이는 공의 휴식처라. 위에는 정자 있고 아래에는 무덤이니 뒷사람이 백세까지 우러러 뵈오리라. 깊이깊이 느꼈기에 그 돌에 명하노라. 행주 기우만은 짓고 통훈대부 홍문관교리 초계 정연시는 쓰고 통정대부 비서감승 진성 이문구는 전자 씀
의사 남재 유공 희탁 유적비
역문
의사 남재 유공 희탁 유적비
한말 당시 영남 좌편 거창 고을 위천에 독립의사가 계시니 곧 궁내부주사이신 거창유공 한제이니 자는 사범이요 호는 남제이시다. 그 선대는 병부상서문양공 전은 시조요 사헌부 대사헌 환공은 중조이시며 고는 계홍이요 비는 동래정씨니 고종을유년에 금원산아래 금곡동에서 태어나시니 기우가 왕성하고 기개는 높고 뜻이 커서 진실로 정의 있는 곳이면 언제나 솔선하니 많은 사람들이 감복하고 흔앙하더라. 때는 한일합병을 당하여 기미독립운동이 전역에서 일어나 맨주먹으로 저들의 총탄을 무릅쓰고 회한 없는 죽음을 맹서함은 민족의 쌓인 울분과 의열의 발로였으며 비록 일을 일시에 구제치는 못하였으나 실로 후일 광복의 기근이 되었으니 이때 거창의 위천 고을에 그 함성이 심히 높으니 일방표솔자는 실인 즉 남재유공이었으며 그 후 나라가 광복이 됨에 후인들이 그 의로움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분들 사실을 살펴 의거의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또 온 종중이 그 선조 영사정 신도비아래 돌을 다듬어 공의 유적비 세울 것을 상약하여 의사의 유적비에 쓰일 현각문이 없는 고로 종인 경연 명수 군이 나에게 이글을 청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공과 나는 병이가 같으며 어찌 감히 마다하리요. 생각해보면 그 후에 동란을 겪으면서 문권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다행히도 그 사증이 안의읍지와 경남 3․1운동사 거창군지 이승만 대통령 표창장 성균관장 박중훈 표창장 노태우 대통령 훈장 거창유씨 세보 등에 역역하고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공은 본대 세상에 크게 쓰일 대재량이었으나 조금도 갚음이 없었고 배일기개가 남보다 다르더니 을사보호조약에 이르매 비문강개해서 구국지책에 매양선봉에 섰고 태황의 비보를 듣고는 북망 호곡을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고 인산 후 독립선언서낭독후에 온 겨레가 일제히 분기한즉 공은 안의지방의 민중선봉이 되어 군중의 용기를 북돋우니 그 함성은 땅을 뒤흔들고 의기는 충천해서 저들과 다행하며 왜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여 저들의 총검과 싸워 연이은 살상에도 격려하고 조금도 기개가 꺾이지 않더라. 체포구금 후에도 통열히 저들을 꾸짖기를 마지아니하고 이번 기미사의 책임자임을 자임하고 다른 사람에게 연계시킴은 불가하다고 호통하니 이로 인해 진주감옥에서 삼년옥고를 치르면서 갖은 고문을 겪어 몸에 온전한 살갗이 없었으나 시종 흔들리지 아니하니 모두 장하다고 하더라. 그 후 왜경의 혹심한 감시를 견디지 못한 아들은 솔권해서 세상을 숨었고 공은 풀려났으나 두문사세하고 오직 시서로 업을 삼았다. 광복 후 병신 구월초삼일에 돌아가시니 금곡촌 뒷산 경좌에 장사하다. 배는 경주 이경일이오 계미년에 출생하여 계축년에 돌아가셨다. 의사에 무후가 불가한 고로 종론으로 재종질 병호를 후사로 이음은 의사의 높은 절의를 오래토록 전하고저 하는 심법이리라. 명왈 일에는 대소가 있을지나 그 이치는 하나로다. 나라위한 의리에도 그런 처지 따름이라. 기미만세 그 함성이 나라 정의 지켰도다. 위대하다. 유공이여 한 고을을 창기하고 일은 비록 구하지 못했으나 그 의로움은 돋보였네. 충천하는 그 함성이 미친바 크고 커서 오랑캐들 몰아내니 산하가 다시 깨끗하고 잃었던 빛 회복되니 일월 빛도 새롭도다. 여러 칭송 이어지니 공은 길이 불사로다.
갑술지월 완산 이근섭 지 병부상서 문양공 34세손 유명수 근서 거창유씨 대종회 근수
위천면 장기리 423번지 창촌마을 영사정 앞에 있다. 의사 남재 유희탁의 유적을 기리는 비로 1995년에 거창유씨 종중에서 건립하였다.
의사 유희탁은 1885년에 남산리 금곡에서 나서 1956년에 금곡에서 세상을 떠났다. 천성이 강직하여 평생을 의리에 살았으며 특히 3․1독립운동 때는 군중의 선두에서 생사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진주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룬 애국지사이다.
<영사정기>
“세월이 오래 됨에 정자 또한 여러 번 중수를 거쳤고, 옛날에 한가로이 노닐며 튼튼하던 것이 이제 또한 비스듬하고, 글방이 기울어 무너지려 함에 지난 을묘년(1975) 후손이 힘을 모아 다시 중수하고, 훤칠하게 옛 모습을 회복하니, 아 시내와 산이 아름다움을 더하고 꽃과 돌이 기꺼이 빛을 내도다.”
고려말에 국운이 기울자 위천 금원산으로 은거한 달암공을 따라 영계 유환도 은거하여 영사정을 짓고 소요하다가 세월이 오래되어 후손들이 이어오며 중수했다는 누정의 내력과 역사를 부각 시키고 있다
불이재
남산리 재 넘어 월현에 소재한다. 여말 충신 대사헌 영계 유환과 그의 아들 용궁현감 유담 양대의 제향지소로 후손들이 세웠고 재호와 기문은 회당 임필희가 지었다.
역문
불이재기
대개 일신으로써 강상을 지탱하여 충혼과 의혼이 천지에 가득하고 만세에 뻗치게 됨은 어찌 반듯이 한주먹의 흙(묘소를 지적함)에만 일삼을 뿐이겠으랴. 그러나 묘소라 함은 자손이 조상의 체백을 안장한 곳이므로 상로를 밟고 감상을 일으키게 된다.
아! 영계 유선생께서 고려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강복으로써 맹서하고 성조의 불음에 나가지 않고 이 고을 신계에 숨어 살면서 길이 옛 임금을 생각하고 마음에는 두날(두 임금을 비함)이 없고 한나라를 복구하지 못한 원안(사람 나라를 걱정하여 많은 정책을 세웠으매 군신이 의라 했다)처럼 눈물을 흘리고 눈 위에 누워 자며 북창의 청풍에서 꿈도 꾸고 동해의 밝은 달도 생각하다가 남은 해를 마치었다.
현택(묘소)을 월현에 높이 봉축한지가 지금에 거의 육백년이 되도록 자손들이 대대로 정성껏 세일사를 받들어 왔는데 서로 한탄하여 정성을 모아 이르기를 비석이 이미 건립되어 도지까지 바야흐로 발간하고 있으나 그러나 금계에 서원 제향도 나라의 금지로 인하여 철폐 되었으니 은현에 재실을 어찌 말겠는가 하고 재목을 마련하고 목수를 불러서 수일 내로 완공하였는데 한숙 한제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까지 주간하게 하고 나 임필희에게 재실 이름을 묻는다. 내가 꿇어 앉아 말하기를 어찌 감당할 수 있으리오 하니 청하기를 더욱 고집하므로 마지못하여 응답하고 말하기를 불사이군이라는 불이로 하는 것이 어떠할까 하니 여러분들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인하여 나 필희 보고 삼자의 액자를 써 주기를 청하고 또 한숙 한제 두 분을 시키어 재실 기문도 지어달라며 이르되 우리 선조의 사적은 자네가 이미 자세히 알고 있으며 그런데다가 영계선조의 증손인 부호군 휘 귀손의 배위는 양녕대군의 손녀 이씨로 묘소가 영계선생의 묘소와 한날 등에 있으니 아울러 기록한다.
아! 슬프다. 선생은 고려의 충신이고 선생의 자손은 아조의 고가이다. 반원이 여러 조정에 걸리어 궁중의 규수와 장가 들은 것으로 보아도 더욱 가히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명문 우족으로써 오늘도 선생이 당하던 그날과 같도다. 옛날과 감상하고 지금 세상을 당하여 이 조상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은즉 오직 재실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그 선생의 불사이군 하던 바에로 빛이 있을 것이다.
은진 임필희는 기문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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