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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劉 門中/ 先祖의香氣

해천재 주련과 목은의 인연

장단음 기사년 12월 6일 목은 이색.pdf

문희공 유창 중시조님의 스승 목은(이색)과 해천재의 주련

 

목은에게 장단으로의 유배가 결정된 것은 1389년(공양왕 원년)12월 초하루 이다. 11월 기묘일에 공양왕이 왕위에 오른 지 보름 만이었다. 1388년 6월 이성계의 일파에 의하여 우왕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이 즉위하였다. 이성계는 이해 4월 명나라가 요동에 철령위를 세우는 것에 반대하여 단행된 요동정벌의 우군도통사가 되었다. 그러나 좌군도통사인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였으며, 고려왕조를 수호하려는 구파 군벌의 대표인 팔도도통사 최영을 실각시키고 고려의 모든 군사권을 쥐었다.

 

대장군이었던 조민수는 목은에게 의견을 물어 1388년 4월 창왕(昌王)을 옹립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이성계 일파는 창왕의 즉위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목은을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창왕이 즉위하고 10월 명나라에 목은이 하정사를 자청하여 들어가 고려의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이미 이성계는 자신의 아들인 이방원(李芳遠)을 서장관으로 함께 보내 견제하도록 하였다.

  

1389년 봄 명나라에서 돌아와 창왕을 뵙고, 다시 여주에 머물고 있던 우왕을 찾아가 경과를 설명하였다. 목은이 명나라에 갔다 온 이후 끊임없이 탄핵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는데, 창왕을 세우도록 하였다는 것과 여주에 가서 우왕을 만났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창왕이 왕씨(王氏)가 아닌 신씨(辛氏)라고 주장을 하면서 목은이 고려의 정통성을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고려 왕조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목은을 축출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목은은 1389년 12월 초하루 둘째 아들 종학(種學)과 함께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며, 나흘 뒤인 12월 5일 장단으로의 귀양이 결정되어 6일 장단으로 출발하였다. 

 

<기사년 12월 6일에 순위부(巡衛府)의 제공(提控)인 박위생(朴爲生)이 와서 신에게 장단의 새로운 거처에서 지내라는 內敎를 전하였다.신은 대궐을 향하여 숙배(肅拜)를 하고는 두 분 시중(侍中)에게 글을 올린 다음에 제공과 작별을 하고 말에 올랐다. 대덕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날이 벌써 저물었으므로 감응사(感應寺)에 들어가서 방을 빌려 자는데, 문생 유경(門生劉敬: 劉敞)이 술 한 말을 가지고 와서 위로해 주기에 잇달아 몇 잔을 마셨더니 약간 취기가 돌았다.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까지 잤다. 그 절의 승려가 아침 예불을 하느라 치는 경쇠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다.>

 

五榜門生摠俊才   다섯 번 과거의 문생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라서

多參鳳沼與烏臺   봉소와 오대에 많이 참여하네.

莫言今日無相送   오늘 전송하는 이가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得此髥劉酒數杯   이렇게 수염 많은 유군과 함께 술 몇 잔 마시네. 

 

장단음의 첫 번째 시의 두 번째 수이다. 제목에서 장단으로 출발하면서부터 첫날밤을 지내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목은은 다섯 번이나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문생들만도 100여 명이 훨씬 넘는다. 그 중에는 재상에 오른 사람도 있고,사 헌부의 관리로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목은이 귀양길에 오르자 안타까워하며 송별하는 사람조차도 없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미 고려의 운명이 쇠하였음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목은의 귀양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음으로는 늙고 병든 몸으로 귀양길에 오르는 목은을 직접 위로해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다가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하여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목은은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 늦게 문생인 유 경(劉敞: 劉敞)이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신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시절의 무상함과 세태의 냉정함을 가슴깊이 느끼고 있는 목은의 쓸쓸하고 울적한 심정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서울 강동구 상일동 190-3에 위치한 강릉유씨재각 해천재 건물 기둥에는 아래와 같은 목은의 글이 주련으로 걸려있어 후손들에게 전해지며 가슴을 아련하게 하고 있다. 
 
 

佛燈明滅曉雞呼(불등명멸효계호)

불등이 깜박이는 속에 새벽의 닭 울음소리 /법당의 등불가물거리고 새벽닭이 우는데

 

身世依然海一漚(신세의연해일구)

내 신세 예나 이제나 바다 속의 물거품 하나 /이 내 신세는 여전히 물거품과 같구나

 

忽聽磬聲深有感(홀청경성심유감)

홀연히 들리는 쇳송 소리에 깊이 느껴지는 마음 /없는 쇠송소리에 더욱 절절해지는내 마음

 

鳳衰何必望蒼梧(봉쇠하필망창오)

봉황이 쇠한 세상인걸 어찌 꼭 창오를 바라리오 /봉의 덕이 쇠했는대 창오를 바라보아 뭣 하리

 

五牓門生摠俊才(오방문생총준재)

오방의 문생 모두 뛰어난 인재로서 / 다섯번 뽑은 나의문생 모두다 준재라서

 

多參鳳沼與烏臺(다참봉소여오대)

봉소와 오대에도 많이들 끼어 있지 / 중서성과 사헌부에 많이들 참여하고 있는데

 

莫言今日無相送(막언금일무상송)

오늘 전별이 왜 없냐고 말씀하지 마오 / 귀향가는 나를 전송하는 이 없다 마소

 

得此髥劉酒數杯(득참염유주수배)

털보 유경의 술을 몇 잔이나 얻어 마셨는걸 / 털보 유경이 술동지고 찾아 왔다오

* 劉敬(유경)은 문희공 劉敞(유창)의 고려때의 이름으로 조선조 태조 이성계 때까지 쓰던 이름이.

[주C-001]기사년 …… 것이었다 : 목은의 나이 62세 되던 공양왕(恭讓王) 1년(1389) 12월에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탄핵을 받고 아들 종학(種學)과 함께 파직된 뒤에 장단의 별장으로 가서 연금 생활을 하게 된 것을 말한다.

[주D-001]내 …… 하나 : 경륜을 펴 보지도 못한 채 의미 없이 세월만 허송하면서 덧없이 생을 마치게 되었다는 뜻의 자조적인 표현이다. 해일구(海一漚)는 불교에서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으로, 《능엄경(楞嚴經)》 권6에 “무상한 인생을 대각의 경지에서 보면, 바다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물거품과 같다.[空生大覺中 如海一漚發]”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봉황(鳳凰)이 …… 바라리오 : 법도가 무너진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순(舜) 임금과 같은 성군(聖君)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뜻과 함께, 과거에 목은 자신을 알아주었던 공민왕에 대한 애틋한 정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봉황은 치세(治世)에만 나타나고 난세(亂世)에는 숨는 법인데, 봉황과 같은 공자가 어째서 이 난세에 나왔느냐고 초광(楚狂) 접여(接輿)가 탄식하면서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쩌면 그토록 덕이 쇠하였는가.[鳳兮鳳兮 何德之衰]”라고 노래한 내용이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나온다. 창오(蒼梧)는 순 임금이 묻힌 산 이름인데, 목은이 세상을 떠난 공민왕을 사모하면서 “창오를 바라볼 때마다 슬픔에 잠기시리라.[一望蒼梧一悵然]”라고 남을 위해 지어 준 시구가 《목은시고》 제6권 〈전양가총공(前兩街聰公) 운운〉 시에 나온다.

[주D-003]오방(五牓)의 문생 : 목은이 다섯 차례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배출한 문생들을 말하는데, 그 숫자가 모두 132인에 이른다고 한다.

[주D-004]봉소(鳳沼)와 오대(烏臺) : 중서성(中書省)과 어사대(御史臺)를 가리킨다.

[주D-005]염유(髥劉) : 수염 많은 제자 유경(劉敬)이라는 뜻이다.  

 

<선민유작 이아고구>
문희공(휘:劉敞 호:仙庵) 의 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