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학사의 동도 절두시
팔학사 절두시(1924년 병사공파보-청주)
(林漢浩政丞 林氏譜牒에 있는 東渡 八學士의 詩文을 옮겨 실었을 것으로 추정)
(1994년 범장 종친께서 지적한 문제의 갑자보(1924년)로 추정 됨)
1.劉荃: 波濤闊矣兮 舟楫利逝 유전: 파도활의혜 주즙이서
파도가 넓게 펴지니 뱃길이 편안 하도다
2.林八及: 八人浮海兮 桂棹蘭檣 임팔급: 팔인부해혜 계도란장
여덟사람이 바다에 떠오니 돛대는 계수나무 삿대는 난초로다
3.許董: 吾徒東矣兮 可以免禍 허동: 오도동의혜 가이면화
우리들은 동쪽으로 가니 화를 면할 수 있었도다
4.宋奎: 接淅而去兮 謝暗投明 송규: 접석이거혜 사암투명
서둘러 가자구나 암흑에서 밝은 곳으로
5.權之奇: 賢士出東兮 竭誠盡忠 권지기: 현사출동혜 갈성진충
어진 선비 동쪽으로 나가니 지극한 忠과 誠은 없으리라
6.孔德狩: 見機而作兮 疎廣之徒 공덕수: 견기이작혜 소광지도
기미를 보아 행함이여 소광과 같은 사람들이로다
7. 薛仁敬: 仙李運衰兮 賢士被讒 설인경: 선이운쇠혜 현사피참
잘 나가던 벼슬아치 운수가 다하니 현사들이 참소를 당하는도다
8.崔冱: 二老入海兮 殷道衰亡 최호: 이로입해혜 은도쇠망
두벼슬아치 늙어 져물어 가니 은도(殷道)는 쇠망하는 도다
위 시문들은 팔학사가 바다를 건너오시면서 총석정 바위에 각 각의 소회를 詩 한수씩 述懷 刻字했다고 하는 시문이다. 이는 林漢浩政丞 林氏譜牒(임한호정승 임씨보첩)에 기록되어 있다.
재기(在起)종친께서 임씨보첩을 보고 이 시문을 발견하는 당시까지는 그전 우리 유문의 초기 보첩에는 언급되거나 기록된 것이 없다.
다만, 초기 우리 강릉보에 보면 학사(學士)들이 동쪽으로 건너 오셨다는 것만 기록되었고 그 밖에 행적은 심히 모호하기로 의아스러웠는데 음죽(陰竹-이천의 남쪽 경계지역의 옛 이름)에 사시는 재기(在起)종친께서 임한호(林漢浩) 정승(政丞)댁의 임씨보첩(林氏譜牒)을 참고하다가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연유가 궁금하고 우리 후손들이 더욱 더 탐구하고 고증해야 할 과제이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은 劉荃 도시조께서 팔학사와 동도해 오셨던 때를 깊이있게 다시 조명하고 연구해봐야 할 것이다.
임한호[林漢浩]는 1752년 생으로 1827년 사망하였으며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 경소(景昭). 시호 정간(貞簡). 1783년(정조 7) 생원이 되고 179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1800년 이조참의를 거쳐 1803년 대사간 때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논의하다가 파직당해 안주(安州)에 유배되었다.
1804년 대사간에 복직되고 1805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형조판서·이조판서·우빈객 등을 지내고 1821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1823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 때 서얼의 등용을 주청하여 서자(庶子)도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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