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루성시조(劉累姓始祖) 소개
劉累是
遠古部落聯盟陶唐氏首领堯的後裔,是被史學界所認同是劉姓歷史上第一位名人,被省内外劉姓所信奉的劉姓始祖。据《左傳》,《史記》記載,劉累生活在夏代孔甲年間,因出生時手上顯現“劉累”紋樣,家人以爲吉祥,遂以劉累爲名。爲劉氏始祖。
"유루"시조는 먼 옛날 부락연맹 시대에 도당씨 수령인 "요"의 후손이며, 사학계에서는 유씨 역사상 첫 번째 명인으로 인정되고 있고, 성 내외를 불문하고 신봉되고 있다."좌전"에 근거하여,"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유루는 하나라 시대의 공갑년간 사람이며, 태어날 때에 손바닥에 "劉累"라는 문양이 있어서 가족들은 이를 길상이라고 생각해서, 유루를 곧 이름으로 하기로 하고, 이는 유씨 시조가 된다.
简介
黄河中下游華夏民族夏代,夏帝孔甲帝得到雌雄二龍,聽说劉累曾學養龍于“豢龍氏”,就命劉累養龍,因劉累養龍有功,孔甲賜他“御龍氏”,後來一龍死,劉累將其制成肉羹獻给孔甲帝,孔甲因之味美,命令劉累再獻,劉累因懼怕龍死之事暴露,遂遷到中岳嵩山南側的堯山(大龍山,又名石人山)東麓,河南魯山縣昭平湖地區
(今河南魯山),在此垦荒漁獵,最後卒葬于此,劉累子孫後來便以劉爲姓,成爲我國劉姓的最早起源。
소개
황하강 하류 지역 하민족의 하나라 시대에 하나라의 공갑왕은 자웅의 두마리 용을 얻게 되었는데, 듣자니 유루는 이미 환룡씨로부터 용기르는 법을 배웠다고 하니 바로 유루에게 용을 기르도록 명을 내렸다.
유루가 용을 잘 길러 공을 쌓자 공갑왕은 유루에게 "어룡씨"라는 성을 내렸는데,그만 용이 한마리 죽자 유루는 이것을 육갱을 만들어 공갑왕에게 드렸는데 그 맛이 좋자 공갑왕은 유루에게 더 만들기를 원했다.
이제 유루는 용이 죽었다는 사실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서 결국은 악숭산 남쪽의 요산(일명 대룡산 또는 석인산이라함) 동쪽기슭 곧 하남성 노산현 소평호지구(지금 하남성 노산)인데 이곳에서 땅도 일구며 고기도 잡고수렵도 하면서 지내다가 이곳에서 죽어 장사 지냈는데 유루의 자손들은 이후에 곧 유를 성씨로 삼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의 유씨성의 최초 기원이 된다.
《史記正義》引《括地誌》云:“劉累故城在洛州缑氏縣南五十里,乃劉累之故地也。”古缑氏縣今屬河南洛陽偃師縣,轄境西南有地名劉聚,相傳是他養龍是所据處。
<괄지지>를 인용한 <사기정의>에서 말하기를 :"유루 옛 성이 있는 곳은 낙주 구씨현 남쪽 50리 지역이고, 이을 가리켜서 유루의 살던 곳이라고 한다. "옛 구씨현이란 지금의 하남성 낙양 언사현이고, 이곳 서남쪽에 유취라는 지명도 있다. 전하는 바로는 그가 용을 길렀던 곳이라고 한다.
堯之裔孫
劉累,堯之裔孫。早年,劉累曾向豢龍氏董父學豢龍,御龍于豢龍氏。約公元前1879年,夏孔甲帝時,天降龍于今河南省臨穎縣豢龍城東南角龍蕩溝處。孔甲派劉累到此養龍,長達7年這久。因劉累養龍御龍有功,孔甲封他爲御龍氏,代行豕韋國君。
後因一雌龍死,累斃龍肉加工成美食,送給孔甲喫,孔甲香用後,感到味道鮮美,又向劉累求食,劉累怕死龍事發,孔甲追究問罪,便于約公元前1873年,劉累便遷到堯山《大龍山》
東麓,今天的河南省魯山縣隱居,隱匿了,隱匿了原來的名字,改稱“丘”,人稱“丘公”,稱隱居的地方爲“丘公城”。孔甲知道後,不再追究,丘公改爲劉累,劉累族人遂改姓劉氏,中華劉姓遂劉累繁衍生息。
요의 후손들
유루는 요의 후손이다. 오래전에 유루는 이미 환룡씨 동부로부터 용기르는 법을 배운 바 있다. 기원전 1879년 하나라 공갑제 시절에 하늘로 부터 하남성 임영현 환룡성 동남쪽 룡탕구라는 곳에 용이 내려왔다.
공갑왕은 유루를 이곳에 보내어 용을 기르게 했다.이 기간이 무려 7년이나 되었다.
유루는 용을 잘 길러서 공이 있었으므로 공갑왕은 그를 어룡씨 땅에 봉하여 시위국 임금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 후에 암놈 용이 한마리 죽자 유루는 이 죽은 용 고기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공갑왕께 드렸는데 공갑왕은 이를 먹어보고 너무 맛 있어서 다시 또 유루에게 원하자 유루는 용이 죽은 사실이 발각되어 공갑왕에게 처벌 될 것이 두려워 기원전 1873년경에 대룡산이라고 하는 요산 동쪽기슭으로 옮겨왔다.
오늘의 하남성 노산 이곳에 은거하여 이름도 숨기고 구라고 이름을 바꿨다. 사람들은 구공이라고 불렀다. 그 숨어살던 곳을 "구공성"이라고 한다. 공갑왕이 이를 알았지만 재론치 않음으로써 구공이라는 이름에서 유루라른 이름을 다시 쓰게되며 따라서 유루의 족인들도 모두 유씨로 성을 바꾸게 된다. 이렇게 하여 중화 유씨는 결국 유루의 자손이 번성한 것이다.
早在明代前,後人把邱公城附近的耿集鎭(古稱竹山峪寨)雅稱“豢龍故里”,又在西寨門迎門額上镶刻“豢龍故里”門額石記之。劉累終卒于今河南省魯山縣邱公城,葬于邱公城東北30米處,二十世紀五十年代,修築昭平湖,劉累墓便没于昭平湖中。
오래전 명나라 이전 후인들은 옛날 죽산욕재 라고 부르던 구공성 부근의 경집진을 환룡고리 라고도 애칭한다.
또한 서재문 영문액 위에는 환룡고리 라고도 새겨 놓았는데 문 위에는 그것을 석각해 놓았다. 유류는 말년에 하남성 노산현 구공성에서 삶을 마치자 구공성 동북 30미터쯤에 장사되었는데 1950년대쯤 소평호수를 쌓을 때에 유루 묘지는 결국 소평호수에 묻힌다.
族譜記載
劉累公(聚義公長子),字華美,生于夏廑帝三年癸未(公元前1898年),劉氏族譜中爲刘氏十八世祖,卒于夏桀三十一年癸酉(公元前1845年)享壽壹百一十一歲,(一說累公享壽一百零七歲,又一說累公壽八十四歲)。公誕生時,兩手握拳凡三年。张開時兩掌現龍紋,幷有文在手曰:累,因以爲名。事夏孔甲,公學擾龍於豢龍氏,十歲能擾龙。夏孔甲帝時天降二龍于朝,雌雄各一,帝令累公飼養,公能飮食之。帝嘉,于孔甲三年甲辰(公元前1877年)晋封累公爲右丞相,幷御批賜累公爲御龍氏。孔甲七年戊申(公元前1873年)一雌龍死,累公潜醢以食王,王使求之,公恐懼,帶領家少奔魯(河南平頂山市魯山縣)避禍,時年二十六歲,遂遷于河南平頂山市魯山縣安家置業。
족보기재
유루공(취의공 장자) 자는 화미 하 나라 근제왕 3년 계미년(BC1898년) 유씨 족보에서 유씨 18세조로 하나라 걸왕 31년 계유년 (BC 1845년) 사망하여 111세를 살았다.(일설에는 107세, 일설에는 84세를 살았다고 함)
유루가 태어날 때에 쥔 주먹은 삼년이나 되었고 주먹을 펴자 용문양이 나타났고 또 루라는 글자도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루로 했으며 하나라 왕 공갑은 유루에게 환룡씨에게서 용 길들이는 법을 배우게 했으며 열 살이 되자 능히 용을 길들일 수있게 되었다. 하나라 공갑왕 때에 하늘에서 두마리 용이 조정에 내려 졌는데 암수 한 쌍이었고 공갑왕은 유루에게 기르도록 했다. 유루는 이것을 음식을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임금은 기뻐했는데 공갑왕 삼년 갑진년(BC 1877년) 진은 유루공을 우승상에 봉하고 왕은 유루공에게 어룡씨를 내렸다.공갑왕 칠년 무신 (BC1873년) 암룡 한 마리가 죽자 유루공은 건육을 소금에 절여 왕에게 올렸는데 왕이 다시 이 음식을 찾고자 할 때에 유루공은 위험을 느끼고 가족을 데리고 하남성 평정산 노산현으로 도망처 피해버린다. 이때가 26세였고 결국 평정산 노산현에 자리잡아 편히 살게 된다.
劉累墓
劉累墓于平頂山市魯山縣城西國家水利風景名勝區昭平湖景區附近,國家地質公園,國家AAAAA級風景名勝區堯山(又名石人山,古稱大龍山)東麓。207,311國道交匯于此,在魯山縣城乘坐魯山至石人山,江河的汽车沿311國道行驶10公里即可達到昭平湖景區大門,再順沿景區大道東北方向0.2公里到達劉累墓,劉累墓距劉氏與龍文化碑林0.2公里,緊隣劉累祠。
유루묘
유루묘는 평정산 노산현성 서쪽 국가수리 풍경명승지 구역인 소평호 풍경구 부근에 있고 국가지질공원이며 국가 AAAAA급 풍경명승구역인 요산(다른 이름은 석인산, 옛날이름 대룡산) 동쪽 기슭에 있다.
국도 207,311라인이 곧 이곳에서 모아지며 노산현성에서 노산발 석인산행을 탄후 강하행 버스로 311국도를 따라 10킬로쯤 달리면 소평호 풍경구 정문에 이른다. 그리고 풍경구 큰길을 따라 200미터가면 유루 묘에 닿는데 이 유루 묘는 유씨 및 어룡문화 비림에서 200미터 떨어져 있어 바로 유루사당 옆이기도 하다.
劉累墓,劉累祠,劉氏與龍文化碑林共同形成了参觀劉累的旅游線路。2000年4月,在史學界和魯山縣委,政府的關心下,魯山縣有關部門又在昭平湖風景區重新修築了劉累墓,海内外更多的劉姓族人前來尋根問祖。
유루 묘와 유루 사당은 유씨와 용문화 비림이 공히 이루어져서 유루의 사적 참관 노선을 이룬다. 사학계와 노산현위원회 그리고 정부의 관심하에 노산현 유관부문은 또한 소평호 풍경구 유루 묘를 다시 다듬어 해내외에 있는 유씨 족인들이 와서 조상을 찾아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강릉유씨대동보에 수록된 劉姓의 由來
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에 의하면 우리가 유자(劉字)로 성(姓)을 쓰이게 된 것은 중국고대의 제요도당대(帝堯陶唐對)의 후손이 유(劉)땅에 수봉함으로부터 유자(劉字)를 성(姓)으로 쓰게 되었다. 원래는 지명을 나타내는 글자로서 춘추시대의 정(鄭)나라 읍명으로 지칭하였다가 그 후에도 주(周)나라에서는 大夫의 채지(采地) 또는 하남성 언사읍(河南省 偃師邑)의 읍명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춘추지리고(春秋地理考)는 밝히고 있다.
그 후 하(夏)나라 십사세 공갑왕(孔甲王)으로부터 유루(劉累)라는 분에게 어룡 御龍)氏로 사성하였고 상(商)나라 때에는 豕韋(시위)氏로 또 주(周)나라 때에는 당두 唐杜)氏로 각각 성(姓)을 고쳐 불렀으며 습숙(隰淑)이 진(晉)나라에 가서 사씨(士氏)라 하였고 사회(士會)가 다시 태국(泰國)에 갔다가 다시 진(晋)으로 돌아온 후 후손이 다시 유씨(劉氏)라 하여 오다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 이르러 한제국을 창건하고 황제에 등극하였으니 우리 유씨는 한제국의 태조 고황제 유방 선조의 위대한 혈통을 이어받은 훌륭한 후손인 것이다.
따라서 문헌으로 보면 유구한 반만년전 중국고대 하 왕조말엽에 유루 劉累라는 분이 바로 유씨본원의 성시조(姓始祖)인 것이며, 이분의 묘지가 현재 중국 하남성 평정산시 노산현 소평호 에 모셔져 있으니 우리가 2018년 4월 18일에 가고자 하는 곳이 바로 여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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