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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劉 門中

韓國 劉姓始祖 諱 “荃” 文襄公先祖님 硏究

韓國劉姓始祖 竹諫劉先生 紹介 (한국유성시조 죽간유선생 소개)

■ 문양공 죽간유선생세가 고병서 역문

무릇 우리 유씨는 ①도당제요의 후손이라 이 혈통에서 성제와 현왕이 되신 분이 수백여분이요 문무의 공후가 되신 분이 수천여분이라 저 중원천하가 한나라가 아니었은 즉 능히 하나로의 통일정체를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며 우리 「劉」씨가 아니었다면 ②하, 은, 주삼대의 도덕정치를 계승시키지 못하였을 것이니 그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성황제요께서는 중원천하의 개국성조이시다. 때문에 ③「尙書」에 이르기를 「옛날 제요를 상고하건대 지극한 공훈을 세웠으며 공경스럽고 총명하시며 문채 나시고 또한 생각이 깊으시도다. 진실로 공손하시고 능히 사양하사 그 빛이 사해에 가득차서 하늘과 땅까지 이르셨도다. 능히 높고 큰 덕을 밝히사 ④구족을 화친하셨도다 백성에게 명덕을 밝히게 하시고 이에 만방이 협화되어 온 백성들이 ⑤시옹하여졌도다」라고 하였도다. 또 공부자께서 말씀하기를 「제요가 임금이 되심이며 높고 높기가 하늘과 같도다. 오직 하늘을 본받으시니 넓고 넓어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이름 짖지 못하도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로다.

 

그 후예 「累루」라는 분을 「劉」라는 땅에 봉하여 유씨로 「성」을 삼게 되었다. 그 후 하나라 때는 어룡씨라 했고 상나라 때는 시위씨라 했으며 주나라 때에는 당두씨라고 하였고 진나라 때에는 사씨라고 했으며 사회가 진나라에 갔다 다시 진으로 돌아와서 유씨가 되었으니 이것이 한나라 태상황 휘 煓 이전의 선계이다. 무릇 요와 순과 우의 「상전지도」는 천하대동의 덕정인것이요 하와 은과 주의 「세습지의」는 봉건소강의 예치인 것이다 그러나 주나라가 쇠잔함에 이르러서는 왕정의 권형이 없어지니 비록 ⑥오패들이 차례로 일어나니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높이고저 꾀했으나 이 또한 「군약신강」의 「꼴」이 되어 힘으로써 「인」을 빌리는 행위이었기 때문에 종주국으로서의 덕치원리를 제후국들에게 심지 못하였다. 그러나 가보니 열국들끼리 서로 싸워 백성들은 편안 할 날이 없었고 급기야 천하는 대란에 빠지게 된 것이로다. 이러한 때에 비록 공자나 맹자 같은 성인이었다 하나 그 「위」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세상을 광구할수 있었겠는가? 드디어 ⑦진왕여정은 일직이 전례가 없었던 악정을 자행하여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학문하는 선비를 땅에 묻어 죽이는 행패에 이르러서인 즉 저 황천이 어찌 크게 노하지 않겠는가? 드디어 한태조고황제를 강생시켜 진나라를 처 악을 없애고 천하를 통일케 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고황제께서는 요순의 ⑧「윤집궐중」의 덕정을 계승시켜 공부자를 대뢰의 예로서 제사를 지내고 하, 은, 주삼대의 왕도정치를 크게 드러냈다. 이러므로 고황제께서는 후세제왕들의 사표가 되신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서 문제, 경제, 무제, 같은 분들이 고황들의 뜻을 잘 받드는 명군으로서 선성들이 가르친 유교이념으로 전통적인 문물제도를 완비시켜 놓았다. 오늘날 우리 세계가 동쪽으로부터 서쪽에 이르기까지 우리 「劉姓의 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은 문명세계에 이르렀겠는가? 또한 후한시대에 광무제 명제 장제같은 분들은 문치와 무치를 겸전한 영주이었으며 ⑨촉한의 소열제와 ⑩남조시대 송무제같은 분들은 다 한실의 후예들로서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에 있어 창의숭덕을 내 걸고 천하를 구하려 했던 분들이다. 비록 왕도의 대업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남북오랑캐들의 발호를 제거하여 중화를 수호한 공들이 청사와 죽백에 등재되어 있으니 이 또한 위대한 분들이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 유성의 사람들이 이러한 분들의 후손이라고 할진대 그들이 사는 곳이 동서양 어디를 막론하고 몸가짐과 마음 씀이 오직 바른 것을 지키면서 높은 긍지를 갖고 사는 것이 마땅치 않겠는가?

 

성조이신 대한태조 고황제 휘「방(邦)」은 바로 선왕의 39대조가 되시니 태조의 제5자 태종문황제 휘 「항(恒)」은 선생의 18대조가 되시고 그 아들 경제 휘 「계(啓)」는 선생에게 37대조가 되시고 경제의 제8자 장사왕 휘 「발(發)」은 선생의 36대조가 되시고 장사왕의 제2자 춘릉후 휘 「매(買)」는 선생의 35대조가 되시고 춘릉후의 증손인 회남왕 휘 「흠(欽)」은 선생의 32대조가 되시고 회남왕의 제2자가 곧 동한창업의 광무황제 휘 「수(秀)」이시니 이 분이 선생의 31대조가 되시며 광무황제 제5자 명제 휘 「광(光)」은 선생의 35대조가 되시며 명제의 제5자 장제 휘 「달(炟)」은 선생의 29대조가 되시며 장제의 장자 청하왕 휘 「慶」은 선생의 28대조가 되시며 청하왕의 증손 장평후 휘 「릉(陵)」은 선생의 25대조가 되시며 장평후의 현손 상서교주 휘 「珍」은 선생의 21대조가 되시며 상서교주의 손 간의대부 휘 「식(式)」은 선생의 19대조가 되시며 간의대부의 증손 우위장군 휘 「롱(隴)」은 선생의 16대조가 되시며 우위장군의 자 남조대에 홍유 시 현정공 휘 「우(訏)」는 선생의 15대조가 되시며 현정공의 손자 한림학사 휘 「담(聃)」은 선생의 13대조가 되시며 한림학사 5대조인 ⑪수대제군태수 휘 「회위(懷慰)」는 선생의 8대조가 되시고 그 아들 상서우승 휘 「묘(杳)」는 선생의 7대조가 되시고 상서우승의 손자 당대경원절도사태자태전 휘 「면(沔)」은 선생의 5대조이시다.

 

고의 휘는 「채(采)」이시며 금자광록대부이었고 조 휘 「적(迪)」은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증조 휘는 「종(宗)」자 「거정(居正)」은 추밀원직학사 겸 좌간의대부를 지내셨도다. 그 아우는 휘가 「총(聰)」인데 중화에 있으며 고조 휘는 「무(懋)」 자는 우중(又仲)인데 ⑫후당 천성대에 태위사마를 지낸 분으로서 시는 선간공이시다.

 

선생께서는 송조 인종황우삼년 서기1051년 신묘 04월 08일에 탄생하셨으니 천부의 성품이 강의 정직하셨고 학문이 정수하여 모든 경사에 박통하셨다. 신종 초에 등제하여 「현」과 「부」의 지사를 지냈고 대간에 어사를 거쳐 원풍연간에 병부상서를 제수 받으셨도다. 이때 선생의 춘추가 40세 전으로 선생의 경륜과 그 인물됨이 군계의 일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송나라 역사를 대략 살펴본다면 인종, 신종 양대는 ⑬오대말 후주의 무장이었던 조광윤이 주나라 어린 왕 참제로 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창업한지 80여년이 된 때이다. 진종이 죽은 다음 인종 즉위함에 그 나이가 불과 13세었으므로 그 어머니 유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러하므로 인하여 환관들 과 권력에 눈이 어둔 간신들이 그 틈을 타서 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이 가운데서도 간신의 대표격인 왕증과 여이간은 어느 때는 황제에게 붙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태후에게도 붙기도 하면서 권부의 인사정책을 제 마음대로 함으로서 공도명 여정, 구양수같은 직신들이 모두 다 부와 현으로 좌천당하여 축출되고 보니 조정에 모든 기구가 비어있는 처지가 되니 모든 서정이 말할 수 없이 문란해 진때 이었다.

 

여기에다 또 북쪽 료나라와 사번에서 일어난 서하나라가 영토와 무력이 강성함을 내세워 황제를 칭하면서 송나라를 핍박하였다. 그러나 중원에 종주국 역할을 하는 송나라는 군사가 약하고 재정이 궁핍하다보니 이것을 도저히 제지 못할 지경이었다. 할 수없이 료나라에게는 땅을 할양해주고 서하에게는 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타협으로 그들의 칭제하는 행위를 만류시키는 처지었으니 당시 송나라의 형편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했는데 또 복의사건을 계기로 하여 붕당의 정쟁이 일어났다. 그러면 이 복의사건이란 무엇인가? 인종은 아들이 없어 그의 종형인 복왕의 아들을 입승시켜 왕통을 계승시켰으니 즉 영종의 생부 복왕 윤양이기 때문에 황제생부의 호칭문제를 놓고 의론이 분분했던 사건을 복의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당시 대신인 한기와 구양수는 복왕을 「황고」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부필과 사마광은 「황백」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해서 그 시비가 극단에 이르게 되다보니 자연 정파가 생기게 되어 붕당적 정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혼정에 시달리던 중 병약한 영종이 죽고 나이 젊은 신종이 즉위 하였다.

신종이 즉위하자 서정개혁을 부르짖던 왕안석이 참지정사가 되어 독단적 행위로서 삼사조례소라는 것을 설치하고 이른바 신법을 제창하였으니 이 신법이란 무엇인가? 즉 청묘법 보갑법 시역법 모역법등 이것이다. 왕안석이 주장하여 말하기를 「이 신법을 실시하지 않으면 도저히 국부강병을 이룰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시행하는 방법과 과정이 정도에서 탈궤가 되다보니 오히려 모리간 상배들이 조정을 거점하고 정책을 농단하게 되므로 모든 직신들이 도리어 罪를 받고 「폄」을 당하면서 지방으로 좌천되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때 그 재앙을 당한사람들을 열거한다면 감찰어사 정명도, 중서사인 소식, 시어사 공문중, 기거사인 범순인, 어사대부 사마광, 한림학사 구양수, 어사중 승여회, 집현전학사 유창(劉昶), 국자감직강 유반(劉攽), 시어사 유술.유기(劉述.劉琦), 감찰어사 유지(劉摯).유상(有庠), 태상소경 유유길(劉惟吉), 도순검사 유침(劉忱) 등 그 외 대간 수십인 이었도다.

 

당시 황제에게 울린 상소 또는 사론 사찬문 등을보면 영종 치평4년에 국가예악을 제정하는 묘의가 있었는데 황제가 이 회의에 궁중귀인들을 참여시킨 일이 있었다. 이때 판상서 고공 유창(劉敞 1019~1068) 자 원부(原父)가 황제에게 직간하여 말하기를 「예악이란 국가에 있어 막중한 일입니다. 지금 조정에는 유학자들이 많기 때문에 예學에 대한 토론에서 얼마던지 그 대의를 추출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환관 조담 같은 사람이 참석하여 예의를 논한다면 신이 저 옛날 ⑭원앙에 넋이 웃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도다.

또한 오충이 전례 문제로 인하여 죄를 얻게 되었고 풍경 또한 죄를 얻어 파직을 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창이 황제에게 극간을 올리니 황제가 말하기를 오충은 능력있는 신하이다. 풍경 또한 그러한 사람이다. 그러나 중서들이 그 사람들의 너무 강직한 것을 미워하기를 「폐하께서는 직간을 좋아하시는데 중서들이 그들의 말을 배축하는 것은 이것은 임금의 밝음을 가리는 것이요 임금의 선정을 막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은 음양의 합기가 어긋나 일식과 지진이 있거나 풍매의 화가 있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종 희령1년에 유술의 죄를 탄핵하라 하였다. 이때 시어사 유기와 전의가 함께 상소하여 말하기를 「안석이 집정한 이래 수일이 넘지 못하여 조야의 인심이 효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개 안석이 자기 멋대로 국책을 천단하고 헌도를 가벼히 바꾸며 모든 행동을 기탄없이 하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진사람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을 항상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희구하였습니다. 안석같은 사람을 정부에 놓아두고 현인을 구한다는 것은 이것은 연목구어와도 같은 것입니다. 안석이 편견을 가지고 새로운 법을 내세워 천하의 공을 해롭게 하고 있습니다. 안석의 무리와 같은 간상배들이 어찌 묘당에 있을 수 있습니까? 한갓 국가기망만 어지럽힐 뿐이라고 할 때 조속히 파직시켜 천하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여야 할 것입니다. 증공량은 정승의 위치에 있으면서 능히 갈충보국을 아니 할 뿐 아니라 도리어 두려워 몸을 사리면서 속으로는 은총이나 받으려는 꾀를 내고 있으며 오히려 어진 사람들의 나아갈 길을 방해하고 있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변 같은 자 또한 「주머니에 손을 끼고 대신들의 뜻을 어기고 있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소장이 올라가자마자 안석은 유기와 전의를「폄」하여 䘙州監務(위주감무)로 보내는 파직을 하였다.

 

사마광이 이에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공부자 말씀하기를 「도를 지키는 것이 벼슬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고 맹자말씀에 「말을 책임 맡은 자 그 말의 쓰임을 얻지 못하면 그 직책을 그만두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고금의 통의이며 또한 인신의 대절입니다. 안석이 형부의 기능을 없애려하는 것은 천하가 다 잘못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폐下께서 이제 그 「새매」를 구하고저 하면서 오히려 그 새매를 삶으려 하는 것은 장차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이제 유기와 전의의 관계는 너무 강직한 상소란 것이 「흠」이 되는 것입니다. 한갓 대신의 생각을 거슬렀다고 해서 이것을 죄를주어 견책을 시킨 다면 신은 앞으로 대臣들이 무슨 말이던지 하려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도다. 그러나 개봉부에 옥구를 벌려놓고 유술을 세번이나 추국하였으나 유술은 이에 대하여 승복하지 않았다. 이에 안석이 유술을 옥에 가두고저 하였으나 황제는 듣지 않고 강주지부(江州知府)로 좌천시키었도다. 이 같은 일로해서 시어사 유기와 전의는 왕안석과 불화로 인하여 화를 당하고 등주적소(鄧州謫所)에서 죽고 말았다.

 

인종 가우8년 집현전학사 유지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군자와 소인의 다른 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義」를 쫓느냐 「私」를 따르느냐하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재주가 없어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이 「義」에 있지 않고 「私」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상」을 바라는 마음이 항상 사를 먼저 하여 봉공하는 행위를 뒤로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기거와 언동에 있어 덕과 「예」를 몸소 실천하셔야 합니다. 항시 정신을 가다듬고 서정을 친제하셔야 합니다. 지금 천하가 치안을 잊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 천하는 한 가지도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청묘법」이란 것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만기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모든 대신들이 폐하를 잘못 인도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소로 인하여 안석이 유지를 영외로 유배시키려하였으나 황제가 불청하기 때문에 다만 형주감창(衡州監倉)으로 쫓겨나게 되었으나 신종 원풍초에 유지는 다시 입각하여 태상원동지와 집현전학사가 되었는데 또 다시 신법에 불가함을 논하다가 탈직 당하고 신주(新州)로 유배되어 다만 아들하나만 데리고 가다가 행로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다. 사찬을 보면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으니 「왕안석은 재상이 되어 편견과 전학에 빠져 청묘법, 보갑법, 균수법, 시역법, 수리법 등 여러가지 신법을 내세워 천하가 흉흉해지고 공연한 소동을 일으켰다. 백성들이 통곡하고 줄을 지어 원망하였으나 황제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원로대신들을 축출시켰으니 마침내 조종들이 만들어놓은 양법과 선의를 다 무너트려 세상이 혼란하게 되어 인심이 정사를 불신하게 됨으로 재앙이 날마다 일어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사론에서 朱子는 다음과 같이 왕안석을 평하여 「문장과 절행이 일세에 높았다고 할 것이요 더욱 도덕과 경제에 대하여 많은 일을 스스로 맡아서 결행하였다. 신종의 지우를 받아 재상의 위치에 있으면서 모든 이들로 부터 높은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안석은 재리에 급급하고 병혁을 급선무로 삼아 정책을 진행시켰다. 흉사한 무리들을 이끌어 쓰면서 충직한 사람들을 조정에서 쫓아 내버렸다. 너무나 조급하고 강제적으로 정책을 시행하다가 보니 천하백성들이 생활의 즐거움을 잃게 되었다. 마침내 군간들이 일어나게 되어 그 패독이 온 나라로 퍼지게 되었다. 숭화대와 선화대에 이르러서는 화란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지난 날 신종께서 재상될 인물을 고선할때 한기에게 안석에 대하여 그 人品됨을 자문한바 있을 때 한기는 이때 「안석은 한림학사로서는 넉넉한 인물이라 하였으나 재상으로서는 불가하다」라고 한바 있었다. 그러나 신종은 이것을 불청하고 드디어 안석을 재상으로 삼았으니 슬프다. 이것은 송나라에 불행인 동시에 또한 왕안석에게도 큰 불幸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모든 사서와 지론을 살펴본다면 당시 송나라 인종, 영종, 신종 삼대에 있어 온갓 내우외환이 줄을 지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아무 정책적 대책이 없었다. 그 이유를 든다면 첫째 「후비들이 수렴청정을 하는 가운데 환관들이 득세 농권하는 폐단이 있었고, 둘째 복왕의 호칭사건으로 인하여 붕당이 조성되는 폐단이 있었으며, 셋째 안석의 신법제창으로 인하여 국가헌도가 무너져 버리는 폐단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인들이 농권하다보니 군자들은 자연이 재앙을 입고 조정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된다면 정부 관료들을 출척시키는데 있어 무슨 상도가 있겠는가? 혼정이 때 없이 반복될 것은 아주 불을 보듯 뻔한 것이라 이때에 화를 당하고 쫓겨난 직신들이 무수하게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원부, 유술, 유기, 유지등 네 분은 어느 누구보다도 황제에게 범안직간으로 왕안석의 신법폐단을 강력하게 지적하였다. 이분들의 생각과 주장이 충군애민의 충정이었으나 도리어 재앙을 당하고 조정에서 쫓겨나 관외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말 재주를 부려 출세를 꾀하는 자들과 환관무리들이 권위를 빙자하여 망국의 변을 일으키는 작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인즉 나라에 추기를 맡은 사람들은 참으로 조심해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동국시조가 되시는 문양공께서도 또한 화를 당한분이시라 오늘날 우리가 봉장하고 있는 일집의 보유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도다. 「선생의 휘는 「荃」이요 팽성인(彭城人)이시며 자는 원보(原甫) 호는 죽간(竹諫)이시고 관직은 송조 병부상서였다. 선생은 품성이 강의 정직하였고 학문이 정수하여 구경은 물론 천문지지 백가제서를 무불 통효하셨으며 집현전에서 대악을 의정할 당시 황제가 중귀인을 참석시켰을 때 선생께서 이것을 직간하여 중지시켰으며 공어사가 상소로 인하여 「폄」을 당하였을 때 선생께서 극간하여 말씀하기를 「신은 천하의 일을 자갈먹이는 것 같아 대단히 두렵습니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일집기록이 송사열전에 실려 있는 유창(劉敞)의 상소문과 동일한 것을 볼 때 이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또 원풍연간에 청묘취식법 문제가 있을 때 선생께서 극간을 하였으나 황제가 그 소의를 받아드리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송사열전을 보면 유지(劉摯)라는 분의 기록에서 발견되고 있도다.

 

죽간일집에 김해인 배경봉이 쓴 선생행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어사가 상소로 인하여 화를 당했을 때 선생이 극간하여 말씀하기를 「중서환관들이 간관들의 말을 배축시키는 것은 이것은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것이며 천하의 입을 막는 것 입니다」라고 했는데 이 또한 송사열전에 실려 있는 유원부(劉元父)의 상소문과 같은 것이다. 또 천희연간 당론이 붕기할 때 선생께서 사조하면서 친구에게 글을 주어 가로대 「소인들은 공교하여 언 듯 보면 그 처신이 죄가 없는 것 같이 보이고 군자는 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언 듯 보면 「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허물이 없는 것 같은 소인배들은 중용하여 쓰고 흠이 있는 것 같은 군자들은 다 쫓아 버린다면 이것이 어찌 지식있는 자들의 할 일이겠는가」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역시 송사열전을 보면 유지(劉摯)의 상소문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모든 문헌으로 말미암아 본다면 우리 동국시조죽간 유선생은 송조에서 황우와 원풍대 사이에서 대간의 직분을 갖고 정호, 소식, 공문중, 사마광, 구양수, 범순인등 제현들과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면서 소인아배들의 작간하는 것을 물리치고 왕도정책을 펴고자 했던 것이 사실로 증명된다고 할 것이며, 따라서 참소를 당하여 먼 곳으로 유배당했던 것이 사실이라 할 것이다. 이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선생께서 이러한 재앙으로 바다에 떠서 동쪽으로 오셨은 즉 선생의 생애는 「중국에서는 한번 돌아갔던 분이고 동국에 오셔서 다시 살아난 분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위대하고도 또 한편 눈물이 나는 역정이 아니겠는가? 그 희비가 쌍극하는 생애는 저 초나라 범려(范蠡)가 「월나라에서 장군노릇을 했고 제나라에서 재상노릇을 했으며 도(陶)라는 땅에 숨어 주공노릇을 한 것」과 흡사하다고 할 것이니 참으로 눈물을 머금고 탄식할 일이다.

 

차호라 선생은 동쪽으로 오신 후 함자 일체를 고치시고 결코 전사를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다만 송나라 학사라고만 말씀하셨다. 이리하여 휘자를 「荃」이라고 하는 선생의 사적이 송나라 역사에 있을리가 만무한 것이로다. 그러나 선생의 후손인 불초 범장(凡㙣)은 명색 동양경사학을 닦은 학인이라 매양 선생의 사적을 보고 당송의 사서를 볼 때마다 민망하고 초창한 생각을 금치 못했었다. 또 우리나라 전적들을 보면 「혹은 당나라때 동래했다하고 혹은 오대때 동래했다」고 하여 아무 전거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였다. 더욱 웃은 일은 「선생과 같이 동래한분 가운데 한림 임팔급이란 사람이 있는데 이분역시 동국임씨시조로 되어있다. 일집보유문 가운데 종장 재기(在起)공이 말한 것을 보면 임씨보첩 글 가운데 강원도 해금강 총석정 절경상에 다가 팔학사가 글을 지어 암벽에 각자를 해놓았다」는 기록이 있어 범장(凡㙣)이 평택임씨족보를 본즉 「주무왕 원년 기자와 함께 왔다」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나라 한림으로서 신라에 와서 이부상서를 지냈다」고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씨성으로 족보를 만든 백천유씨 족보서문 또는 후문을 보면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 방필한 것이 생생히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선생의 행록에 관하여 「예부상서, 호 죽간 또는 백운 후양 정명4년에 동래했다」고 기록해놓았는가 하면 강릉갑자보서에도 「당나라때 팔학사의 한분으로써 왔다」라고 기록하여 놓았으니 이는 선생행적에 욕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또한 후손들의 배우지 못한 수치라 할 것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불초한 후손 범장(凡㙣)이 비록 천년후에 태어난 몸이지만 또한 하늘이 내신 성황 한고조의 혈손이라 무릇 선생께서는 동국으로 오셔서 韓土에 유종이 되셨으며 이에 소손 범장(凡㙣)이 이 땅에서 태어났은 즉 그 은혜 또한 천재의 실마리가 이어진 것이라 명색이 금세의 유자로서 어찌 민망한 마음이 없겠으며 하물며 평생 소업이 손에서 책자가 떠나있지 않은 「선비」처지로서야 어떠하겠는가?

 

나는 평일에도 겨를이 생기면 당, 송의 사책을 유심하고서 보고 있었는데 증선지가 찬한 십팔사략과 그 밖에 사서를 본즉 그 가운데 특히「한화대사전」과 송사열전내에 선생의 상조휘자가 적연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증조 휘 종(宗) 일운 종(綜)은 송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훈공이 높았으며 태종과 진종대에서 직학사를 지내셨고, 고조 휘 무(懋)는 후당천성대에 태위사마를 지내셨고 시호는 선간(宣簡)이시며 5대조 휘 면(沔)은 당대경원절도사를 지내셨고 태자태보를 지내셨은 즉 이것이 선생께서 재세했던 연대를 추정하는데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불초 범장(凡㙣)에게 와서 이것을 밝히게 된 것이 진실로 하늘의 소시일진대 참으로 기연이면서도 또한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즉 생께서 동국으로 오시기전에 선생은 과연 누구인가? 이미 위에서 말한 「판상서 유창 자 원부, 판형부 유술, 집현전학사 유지, 시어사 유기 이 네 분 가운데 한 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할 것이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 범장(凡㙣)이 알고 있는 선생에 관한 문헌이 송사열전과 그 외 모든 사서내용과 상부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생께서 동국으로 오신 송신종 원풍연간과 고려문종 36년이 서로 같다고 할 때 거의 믿을 만한 증서가 되었은즉 나와 함께 모든 후손들이 답답하게 여기는 근심이 풀렸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이상에서 말한 사현중 「아무개」라고 확연히 정하지 못하는 것은 또 다시 후일을 기다려 보기로 하고 이상 증거 될 만한 설명은 여기서 맺는다.

 

이제 선생의 일집과 그 외 선생께서 동국으로 오셔서 수거하신 행적을 살펴본 즉, 선생께서는 송나라에서 계실 때 신종3년 대악을 의정할 당시 범안하여 직간하시기를 「왕사에 있어 대악을 정한다는 것은 여간 막중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유학자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대악의 원류를 토론할 대신이 남아돌아가는 차제 조담(趙談)같은 자를 참석시키시니 신이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저 옛날 원익의 넋이 웃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중서환관들의 간행을 중지시킨 일이 있으시며 그 후 어사공덕수가 황제에게 직간하다가 「폄」을 당할 때 선생께서 또 극간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직간하시고 중서환관들이 대신의 말을 배축하는 것은 이것은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것이며 또 임금의 선을 그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천지기운이 불화하여 일식 또는 지진 풍매같은 재앙이 있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셨다. 이때 선생께서는 거경진사(擧慶進士)로 급제하시고 채주통판(蔡州通判)을 거쳐 상서고공(尙書考功)자리에 계실 때로다. 비록 약관의 젊은 나이지만 장차 국가를 광정할 대기임을 사람마다 알고 있었을 때이다.

 

천희이후 당론이 붕기하여 대책이 어지럽다보니 구양수, 문언박, 공문중, 사마광 등 여러 사람이 모두 파직좌천되었는데 선생또한 조정을 물러나면서 그 친우에게 글을 주었으니 다음과 같도다. 「소인은 공교하게 처신을 하기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 처럼 보인다. 군子는 그 강직하기 때문에 「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허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소인은 중용하여 쓰고 군자는 그 강직한 것을 흠을 잡아 쫓아 버린다면 이것이 어찌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 할 짓이라 하겠는가?」라고 하였도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자와 소인의 다른 점은 아주 간단하다 소인이라고 하여 재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가짐이 「의」를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상」을 받을 마음을 품고서 언제나 사리를 먼저하고 봉공하는 일은 뒤로 미루는 것이 소인들의 짓이라 진실로 경계하고 경계해야 한다.」라고 하였도다.

 

신종원풍초에 또 다시 입각하시며 집현전학사와 병부상서를 겸하셨도다. 선생께서는 또 상소를 올려 말씀하기를 폐하께서는 기거와 언동을 항상 예덕에 맞게 몸소 행하여야 합니다. 주야로 정신을 가다듬으시고 모든 서정을 친재하셔야 합니다. 오늘날 천하는 안치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느 한가지일도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대개 청묘법을 제창했기때문입니다. 오늘날 모든 정치가 이렇게 된 것은 조정에 있는 대신들이 폐하를 잘못 인도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다.

 

이것으로 인하여 왕안석이 선생께서 원한을 품고 신종은 안석의 말을 허락하지 않고 다만 모든 직책을 뺏고 형주감창(衡州監倉)으로 유배시켰다. 이와 같이 정도로써 황제에게 직간하다가 도리어 참소를 입고 화를 당했으니 오호라 예로부터 남의 신하된 자들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도를 행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할 것 이다.

선생께서는 마침내 「왕도정치」가 이루어 지지 못할 것을 아시고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저 옛날 ⑯굴원이나 양홍은 훌륭하면서도 충성스러운 분들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폐정을 바로 잡지 못하고서 도리어 낙척되는 신세가 되었다 하물며 나는 그 분들에게 비하면 재와 덕이 부족한 사람이다. 조반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도」로써 임금을 섬기고 「직」으로써 몸 가짐을 가졌는데 이제 조정에서 나를 용납하지 않으니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슬프다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광상일구가 있는데 아침 해 볕이 선명하구나 이곳이 옛날 단군이란 분이 나라를 세웠던 곳이구나」하셨도다. 이러한 선생의 술회가 선생이 지으신 부해시서의 단서인 것이다. 이에 지우 임팔급, 설인검, 허동, 송규, 최호, 권지기, 공덕수 등 칠학사와 더불어 바다를 건너 동국으로 오셨으니 때 인즉 송, 신종 원풍5년 고려문종 36년 壬戌 즉 서기 1082년이다.

 

우리가 한 세상을 살어 가는데 혹 한때 집과 고향을 이별하는 것도 비감함을 갖는 것 이어늘 하물며 영원히 고향과 나라를 떠나는 극통한 일이겠는가 선생께서 지은 부해서시 가운데 한 수를 읊어본다면 「한번 동쪽으로 왔다고 어찌 고국의 수심을 잊을 손가 미인을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치 못 하겠구나」라고 하셨다. 이 「운」이야 말로 「애군단장」의 시로서 눈물 없이는 도저히 읊지 못하는 글 이로다. 선생께서는 그 춘추불과 32세이다. 오호라 한나라때 ⑰가의가 장사 땅으로 귀양 갔을 때 굴원을 적위한 「부」가 있는데 「오호애재라 불상한 때를 만났구나. 난세와 봉황이 쥐구멍에 갇혔음에 올빼미 독수리들이 멋대로 놀아나는 구나. 못생긴 무리들이 높은 자리를 찾지 했음이며 아첨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뜻을 이루었네. 오히려 성현을 거슬리고 없이 여김이여 바야흐로 바른 것이 거꾸로 서 있도다. 백이를 보고 탐욕스럽다고 함이여 도척을 보고 청렴하다고 하네. ⑱간장막야를 보고 무디다하고 납덩어리 칼을 보고 날카롭다 하는구나.」이것이 굴원을 적위한 가의의 유명한 「부」인 것이다. 선생의 처지와 십분 방불하다고 볼 때 어지러운 세상에서 정인과 군자가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 고금이 다름없다 할 것이다.

 

선생께서는 동국에 오셔서 처음에 기계 땅에 머무시다가 동거 즉 지금 영천으로 이주하셨다. 지금 보아도 그렇게 벽지일진대 당시 그곳이 얼마나 궁촌이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시운을 잘못만나 그러한 운명을 맞게 되시었다. 선생이 읊으신 자경시를 보면 알수 잇다. 「도를 구하는 데는 가난한 것이 오히려 좋구나. 독서하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속인들과 더불어 멀어지네. 이 마음잡고 놓치지 말아야 우리 인간 본 모습을 찾으리로다.」라고 한 것이로다. 이러한 시운으로 볼진대 선생의 학공은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도학을 근원한 것이로다. 때문에 선생의 속마음을 「생각하건대 상제님이 이 하토를 만드셨으니 누구의 강토이며 무슨 경계가 있겠는가? 따라서 나그네도 없는 것이며 주인도 없는 것이로다. 구역 구역에 모든 백성들이 이렇게 담장을 두루고 사는구나. 이에 집을 광대하게 짖고 스스로 곤고한 것을 달게 받어보자.」라는 뜻이었으니 참으로 위대하다 할 것이다.

 

이에 상서를 베푸시고 예악을 가르치시매 도학의 원리를 강론해서 이단을 물리치고 유학을 밝히시니 부급하고 와서 수업을 받은 자가 무려 수 천 여명이로다. 그렇다면 고려대와 동국유학을 개창 한분은 곧 우리 죽간 선생이라 할 것인즉 저 하늘이 선생을 시켜 이 땅에 성도를 편 것이다 할 것이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三韓땅에 원시적 누속이 문화적으로 씻어졌다고 할 때 선생께서 동쪽으로 오신 것은 하늘이 한 일로서 이 나라 백성들이 큰 은혜를 입었다 할 것이다.

 

고려 선종이 여러번 선생을 불렀으나 선생께서는 중국송조에서 재추의 자리에 있었던 분이라 이것에 어찌 응하였겠는가? 선생 신도비에 「늦게 왕의 부름을 받아드려 성치 보도했다」고 한 것은 심히 의심될 말이라 할 것이다. 선생 시부가운데 「언지」라는 제목으로 지으신 운이 있다 「부귀가 어찌 나를 흔들 것이랴 빈궁을 결코 슬퍼하지 않도다. 만년을 아름답게 마치는 방법은 오직 저 강산을 벗하는 것뿐이네」이것이로다. 또 「범주유」라는 제목의 시를 보면 「서풍이 불어 외로운 배를 씻어주는 구나 그래도 눈에 가득한 온갖 수심은 걷어지지 않는구나. 나의 고향과 옛 나라는 어느 곳에 있는가? 돛대 밖에 보이는 정 강산은 나의 고향이 아니로다. 말 타고 공명자리에 있는 것이 오히려 번거로운 일인 것이니 스스로 물위를 날르는 갈매기를 부러워하노라 「궁」이니 「달」이니 하는 것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 신분을 지킨 것이니 다시 무엇을 구할 것인가」가 이것이로다.

 

또한 先生께서 지으신 수송대기를 보면 「내 비교적 젊은 나이로 조반에 올라 시폐를 바로 하고저 정직으로 임금을 섬기고저 했으나 이것이 용납되지 않아 이렇게 낙척의 신세가 되었으니 어찌 깊은 수심이 없겠는가? 매양 나무잎이 떨어진 쓸쓸한 가을을 맞거나 바다 위에 달이 뜨는 저녁이 되면 서쪽으로 중국땅을 바라보며 임금을 생각하는 마음이 눈물로 변한다. 「자사께서는 「군자는 하늘도 원망하지 않고 사람도 원망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참으로 군자들이나 가능한 일이지 어찌 나 같은 후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랴? 그러나 나는 항시 이 가르침을 마음에 경으로 삼았으니 이 소한과 소회를 잊으려 노력할 수 밖에 없구나.」이렇게 말씀하셨도다. 이것이 선생의 본마음이라 바다에 떠서 이미 창랑수에 발을 씻었거늘 어찌 고려조정에서 영달을 구하였겠는가?

 

선생의 학문은 당, 송의 유학을 근원으로 삼아 문장은 시, 서, 주역, 춘추를 바탕으로 하셨고 그 법은 예, 악, 형, 정으로 「체」를 삼으셨으며 그 뜻은 배우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으며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않으셨다. 이러한 선생의 덕행은 의연하여 이 나라 유림에 사표가 되었으므로 그 후 학자들은 선생을 일컬어 동국도학의 「조」이며 또한 일유의 「종」이라 하였다.

오호라 선생께서는 고려예종72년 임인 02월 07일 송나라 휘종선화4년, 서기로는 1122년에 서거하셨는데 즉 향수가 72세이었다. 송나라 인종 황우3년 고려문종5년 서기1051년 신묘 04월 08일에 탄생하시어 고려문종36년 서기 1082년 임진에 중국에서 동국으로 오실 때 그 춘추 32세이었고 즉 선생의 재세기간이 그 반은 중국이시고 그 반은 동국이시다. 그 누가 선생을 중국 사람이라 할 것이며 그 누가 선생을 동국사람이라 할 것인가 하늘이 위대한 사람을 내려 성도를 펴는 이치가 그렇고 그런 것이니 하늘의 묘수가 참으로 불가사의 한 것이다 할 것이다.

 

그윽하게 당시 중원천하의 형편을 살펴본다면 송나라는 명색이 종주국 이라하나 그 힘이 아주 약세이었다. 이에 반하여 북요와 서하는 말하자면 강국이었다. 이렇게 三國이 정치해있고 보니 고려의 운신이 참으로 곤란하여 그 형세가 마치 저 춘추시대에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어있는 등나라 신세 같았다. 이때는 송나라 철종, 휘종대 이었는데 소인배 장돈 채경 등이 재상으로 있을 때는 구법수호자들을 극렬히 찾아내어 유형을 시키는 극악정치를 하다가 송나라는 요나라를 대신한 금나라에게 망하고 말았다. 금나라에서 망한 저 송나라를 북송이라고 한다. 이에 휘종의 9자 강왕 구가 남쪽 항주에서 즉위를 하여 이것을 남송이라고 하도다. 그러나 이 남송은 사실상 금국에게 칭신하는 처지로 떨어졌으니 설령 고려왕이 선생을 예우코자 했더라도 선생은 고려조정에서 이름을 드러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고려조정에서 어떠한 정책을 말하여주지 못할 입장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선생께서는 선비들에게 성학을 가르쳐 고려백성을 문화적으로 인도하는데 전념하셨던 것이다. 선생께서 40여 년간 존신하신 도는 오르지 극기로서 「인」을 행하신 것이다. 슬프다. 도제들에게 강설하신 문헌이 응당히 많았을 것인데 몽고란 또는 왜란당시 모두 소신되었는지 오늘날 겨우 시부 백여수만이 전하고 있으니 참으로 원통한 일이다.

 

선생께서 서거하신지 백 여년이 지나서 충렬왕 때에 이르러 왕께서 모현 지심이 있는지라 선생의 덕행을 조의에 자문하였다. 이때 은대추부의 제관들이 모두 선생의 산고수장지덕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시호를 문양(文襄)으로 의정하였다. 또 백 여년이 지나서 공민왕대에 이르러 왕께서 전교하여 말하기를 「설공 인검과 유공 荃은 학교를 일으켜 사도를 밝혔고 이단을 물리쳐 중외가 흡연이 젖어 이 분들께서 수업을 받은 사람이 수천인에 이르므로 나라의 빛이 중화와 다름이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림학사 설장수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죽간공 유전은 그가 가르친 유풍이 三韓의 구염을 씻어 버렸습니다. 유학의 진수인 인의지학을 강교하였으니 유공이야말로 동국도학의 「조」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사성 이색과 대제학 박상충이 함께 소를 올려 말하기를 「문양공 유전은 우리 동방도학을 창수한 분으로서 옛날 주공과 소공과 태공에게 견줄만한 분입니다. 아직 까지 추모할만한 장소마저 정해지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런 것으로 말미암아 본다면 우리 동국유학의 근원이 어찌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조 또는 근세에 와서 모든 유자들이 선생의 유덕을 한 사람도 거론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할 것이로다. 이 일이 만약에 소인들이 「비이불주」하는 편견에서 어떠한 폐단이 나왔다고 한다면 참으로 한토유자들의 소견을 심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이다.

 

선생의 유택을 유릉이라고 칭한다. 역대왕명에 의하여 수호되었으므로 지금 경상도 영천군 명산면 화지동 해좌에 모셔져 있는데 지금까지 보존되어 일천년간 향화가 그치지 않고 있다. 일집에 있는 능묘사적기를 보면 한말 혼조당시 묘직이 정대옥이란 자가 본 손의 영체 한 것을 업신여기고 사패지를 모두 제 물건으로 작취하고서 묘표 또는 신도비 같은 것을 모두 땅에 묻어버리고 그 마을에서 부호행세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외손 이주관이란 자는 경내에다 범장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악이 있은 후 정가집 수십인이 일시에 몰사하는 변이 있었던 것이다. 동리사람들이 크게 놀래서 이 능묘를 함부로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의 뜻으로서 위인의 유택을 보호한 것이 아니겠는가? 배는 롱서이씨 로서 진한 국부인 으로 봉해졌고 고려문종33년 기미에 출생하셨는데 월일은 미상이다. 인종1년 계묘 06월 07일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45세이었으며 묘소는 선생 유택원 계하에 모셔졌다.

 

선생께서는 동국에 오셔서 삼자를 두었는데 장자 휘 堅規는 봉익대부로서 도첨의찬성사를 지내셨고 거타군에 봉해졌으며 차자 휘 堅矩는 광정대부로서 밀직사사를 지내셨고 삼자 堅益은 봉익대부로서 대사헌을 지내셨는데 대개 여조 인종대에 출사하여 진충보국을 하셨다. 이후 삼가의 자손이 진신 상계하고 번무 대창하여 소나무 잣나무 등나무 칡넝쿨같이 수십만 호가 청구땅을 가득히 메워 이에 한토에 대성이 되었는데 즉 선생의 인현지덕이 기왕의 천년은 물론 이후 만세에 이르도록 그 빛이 휘황할 것이 의심 없다 할 것이다.

 

견규의 아들 춘무는 문림랑으로서 판삼사를 지냈고 그 아들 은 숭록대부로서 순위장군을 지냈으며 그 아들 은 광정대부로서 밀직사사를 지냈으며 그 아들 는 봉순대부로서 진현관대제학을 지내셨도다. 아들 두 분을 두었는데 장자 은 통훈대부로서 금구현령을 지냈고 차자 은 가정대부로서 홍문관대제학을 지냈다. 의 아들 구는 사헌부대사헌을 지냈고 그 아들 은 용궁현감을 지냈는데 이분들은 거창으로 관향을 삼았도다.

 

은 아들 세분을 두었는데 장자 은 집현전대제학을 지냈고 차자 은 성균관진사를 하였는데 이분들 또한 거창으로 관향을 삼았다. 그 삼자 휘는 승비이시며 고려상서성좌복사를 지내셨고 치사후 강릉부우계현에 복거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이 관향을 강릉으로 삼았도다.

 

복사공께서는 아들이 네 분이신데 장자는 휘 송백 봉익대부로서 고려국상호군을 지내셨고 차자는 송단 우차자 송절은 사적미상이며 사자 휘 송재는 은청광록대부로서 금성군에 피봉되셨다.

 

송백은 아들이 두 분이 있는데 장자 휘 천봉은 고려대에 지안악군사를 지내셨고 차자 휘 천록은 또한 여조 한림원시강을 지내셨도다. 천봉은 아들이 네 분인데 장자 휘 은 조선개국원훈으로 보문각대제학을 지내셨고 대광보국숭록대부로서 옥천부원군에 녹봉되셨으며 차자 휘 은 이조판서를 지내셨으며 우차자 휘 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을 지내시고 세종조에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셨고 사자 휘 는 예문관대제학을 지내셨도다.

 

천록의 아들 휘 은 여조에서 평산부사를 지내셨는데 역성조에 부사하셨으며 麗朝遺臣九隱先生中一人이시다. 송재의 아들 휘 천성은 자헌대부로서 동돈녕도정을 지내셨고 그 아들 휘 는 봉정대부로서 첨의부첨정을 지내셨다. 견구의 아들 웅열은 숭록대부로서 아림군에 피봉되었으며 그 아들 광협는 문하시중을 지냈고 그 아들 한작은 검교대장군을 지냈는데 거창으로 관향을 삼았으며 견익의 아들 은 좌복사를 지냈으며 그 아들 은 성균진사를 지냈고 그 아들 화겸은 도첨의찬성사를 지냈으며 그 증손 국추는 백천군에 피봉되었고 그 아들 은 은천군에 피봉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백천으로 관향을 삼았도다.

 

이와같이 거창 강릉 백천의 삼가가 대창하여 여조와 선조 천 년간에 있어 혹은 도학군자 혹은 재상 혹은 무장 혹은 충의열사 혹은 문장가등이 무수히 배출되어 동국팔역에 대성거벌이 되었으니 선생의 덕광이야 말로 천년이 지났어도 결코 옛날이 아닌 것 같다.

오호라 또 오늘날 우리 후손들이 하늘에 백배 감사해야 할 일이 있으니 즉 선생의 상세계표가 일집에 등재되어 있는 일이다. 목록중 보유문을 본다면 지난 조선 순조대에 홍석주세주라는 분이 춘소절상사로서 연경(燕京)에 가는 일이 있었다.

 

이때 재기(在起)공께서 황금으로 후사하면서 홍공에게 부탁하기를 「한토(韓土)에 사는 우리 유가는 중국에서 오신 송조 병부상서 휘 유모선생의 후예들이다. 그 선대세계를 아직까지 상고하지 못하여 민울한 마음 금치 못하고 있으니 상국에 가서 넓이 유씨세계를 조사하여 갖다 주었으면 감사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당시 청나라의 이부상서 석암 유용(石庵 劉墉)은 상서공의 방계후손이 되는지라 별로 어려움 없이 그 계보도를 갖고 온 것이다. 이 계보도에 의하여 상서공이 한태상황 휘 의 사십대손이 되는 것을 증서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 동국 유문종사에 천행 중 또 만행이 아니겠는가? 송사 또는 한화대사전을 대조해 본즉 그 휘자와 품직이 십에 구는 어김이 없으니 재기(在起)공의 정성이 이루다 말 할 수 없이 크다 할 것이다.

 

오호라 근세 우리 한토는 참으로 시운이 불우하도다. 36년간 왜구들에게 화를 입은 후 이것이 물러가자 또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의 쟁패하는 틈바구니에 끼어 급기야 남북이 분조되는 횡액을 당했도다. 민족이 상잔하는 재앙을 만나 온 백성들이 좌패우전하면서 도탄에 빠져있으니 어찌 망상의 도덕을 알겠는가? 다행이 선생후손들은 숭조돈족하는 대의를 알아 세갑술년에 강릉유씨대동보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 또한 선생의 외덕이 천년이 지난 후손들에게 그림자가 되었는지라 어찌 후손들의 살아가는 영행이 아니겠는가?

 

저간에는 형편이 부적하고 전적열람이 부족했기 때문에 선생의 동래하신 기사를 각구각양으로 기록해 놓은 실수가 있었다. 이후의 후예들이 또 잘못 읽고 오착된 생각을 갖을까 두려워 불초손 범장(凡㙣)은 선생의 후예로서의 뿐만 아니라 사문의 후학으로서 민망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여러해 동안 초심하던 끝에 당, 송, 사서와 그 외 관계가 될 만한 서적을 열람하여 右와 같이 집략하여 삼가 선생의 세가고를 근술하였다. 보는 자 모든 이들은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여 선생의덕에 욕됨이 없게 하기를 바라노라.

단기4327년 갑술10월 중완 태조고황제 72대손

죽간선생 33대손/국재선생25대손 불초 범장凡㙣 근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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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죽간일집수송대기문양공친술 一. 문양공심묘사적기 유인원 찬

 

 

竹諫劉先生遺稿內容中 一部分(죽간선생 유고 내용 중에서)

 

■ 부해소서 바다를 건너 올 때의 일을 서술함

공자께서 뗏목타고 바다에 떠서 동국에 오려는 탄식이 있었으나 실천을 못하셨다. 그런데 선비로서 조정에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이따금 바다에 뜨는 자가 있으니 사양(師襄)의 입산함과 굴원(屈原)의 추방당한 것과 방맹(逢萌)의 부해한 것과 양홍(梁鴻)의 귀양갔던 일이 모두 이와 유사한 예이다. 이분들과 같이 賢良忠直 함으로써도 이미 救時行志를 못했고 또한 군주의 마음을 돌리고 정쟁을 막지 못하여서 역경에 빠짐이 이 같거늘 하물며 현량충직함이 이분들에게 미치지 못한 우리들이야 復言할수 있겠는가. 재량이 부족한 나로써 외람되이 조정에 올라서 군자가 임금섬기는 도리를 좀 본받아 보려고 충직을 행하되 조정에서 용납되지 않으니 내가 어디로 가리요. 이때에 동쪽으로 해상을 바라보니 넓은 뽕나무들(野)한 지역에 아침볕이 선명하였으니 이 땅은 옛적에 단군께서 건도하신 땅이요 箕子가 수봉한 배달나라 邦域으로 인현의 유화가 있었으니 또한 작은 중국이라고 까지 예칭을 받은 곳이다.

도주(陶朱 范蠡)가 오호에서 탓 던 배를 타고 자장(子長)이 강회에서 놀던 일을 본받아서 두루 돌아 내려오니 강호도 절승하거니와 경치도 좋아서 다만 총욕을 잊어버리고 명리를 버리는 자료가 될 뿐 아니라 또한 족히 나의 우울한 심정을 쾌활하게 하여 주는 일대장관이 되는 것이니 공자 부해의 말씀이 어찌 나를 속였으리요.

 

■ 愁送臺記 수송대기

이 대(臺)를 「수송대愁送臺」라고 명명한 이유는 물에 표박하여 이국에 와서 사는 여수를 멀리 내쫓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내가 소시로부터 외람하게도 조정의 참여한 후로 구국선정함으로써 임금섬기는 요망을 삼아 충직으로 봉직하다가 조정에서 용납하지 아니함으로 드디어 처량하게 역경에 빠져 고려나라에 망명객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여수인들 없겠는가. 매양 궁산에서 나무잎 떨어지는 가을과 해상에 달 밝는 밤을 당할 때마다 서쪽으로 중국땅을 요망하면 군주를 사모하는 정성과 옛일을 회상하는 심사가 처연하게 일부의 수루를 지을 뿐이다. 그런데 사대부가 조정유신들로부터 피도하게 되는 것도 또한 운명이니 어찌 죽을 때까지 한탄만해야 하겠는가. 자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군자라야만 가능한 바요. 나와 같은 후생으로서 가히 만홀이 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내 마음으로 하여금 항상 차훈에 집념하면 또한 족히 불평 심을 망각하게 될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여수를 내쫓는 것도 내 용심여하에 달려있는 것이거늘 하필이면 대(臺)를 건축하여 수송이라는 대명까지 붙일 것이 뭐가 있는가. 그렇지가 않다. 내가 취적할 바가 있으니 대개 대사라는 것은 등림소요의 락을 부쳐서 동시에 영욕과 희비를 잊어버릴 수 있는 자료가 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 대를 수송이라 명명하고 나와함께 동도하였던 분들 중에2~3인과 더불어 날마다 대상에 올라 율리귀래사(진의 도연명이 팽택령이 되였으나 귀거래사를 읊고 벼슬을 떠나 율리에서 전원생활을 했음)를 외우고 난정에서 상영했던 정취를(진의 목제가 영화 09년 03월 03일에 당시명사 11명이 난정에 모여서 곡수에 잔 띄우고 계연을 베풀며 시를지어 읊었음) 서창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고 명예와 이익을 유기하고 스스로 만족을 느낀다면 굴삼여가 이소경을 읊던 원한(초의 굴원이 피도하매 이소경을 지어 충간하였으나 용납되지 아니하여 골라수에 빠져 죽음)과 가장사가 복조부를 읊던 한탄(한의 가의가 장사로 좌천 되였을 때 복조부를 지어 읊으면서 수심을 잊었음)도 오히려 가히 나의 심중에서 잊혀 지리라. 그러면 내 마음도 거의 나를 속임이 없을 것이며 대명도 또한 나에게 적의할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에 기하노라.

 

■ 부록

〇여덟 분 學士성명

임팔급 汲자를 及자로 고침

설임검 初諱는 인경

허 동유 전

송 규최 호

권지기공덕수 初諱는 덕부

一. 황조(당대천자의 조정)여덟분 학사(高官을 우대하여 수여한 칭호)의 신분으로 동시에 참소(간신들의 무고)를 입어 동해의 고려 나라에 귀양오셔서 처음 초해용포리에 있는 里名)에 와서 터잡아 거주하셨다고 했음.

二. 초해창주(이명동지인듯)용포리 팔학산 아래에 터 잡아 거주하였음(강릉보첩)

三. 세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경주기계현 경상북도 영일군에 있는 지명인 기계현(고려때 경주로 이속했음)에 팔학산이 있는데 팔학사가 있음으로써 이름 붙여짐.

 

■ 빠진 것을 보충함

先生의 諱는 「전」이요 字는 「원보」요 號는 「죽간」이니 팽성(중국 강소성에 있는 현으로서 宋나라의 읍)에서 출생한 분으로 벼슬은 병부상서(이조때 병조판서 지금 국방부장관에 해당됨)였음...이하

宋나라 仁宗皇祐 辛卯(인종황우 신묘) 서기 1051년四 02월 08일에 출생하여 神宗元豊壬戌(신종원풍 임술) 서기 1082년 08월에 고려 문종36에 동도하고 예종 17년 임인 서기 1122년 02월 07일에 별세하니 향년 72세이다.

단성이 굳세고 학문이 순수하여 구경(역경 시경 서경 예기 효경 춘추 논어 맹자 주례)과 백가(많은 학자들의 글)와 천문학 지리학...이하

집현전(당대부터 경적을 간행하고 일서를 수집하는 관아)에서 대악(宋의 악명대안)을 의정할때 중귀인(궁중환관)이 참사하거늘 공이 임금께 간하여 그를 막도록 했고 공어사(덕부)는 간하다가 관직까지 떨어졌다. 공이 또 극간하여 가로되 「신이 생각하건데 (환관이 직언을 배축한 것 은 폐하의 총명을 가리고) 천하의 입들을 다물게 하려는 것이다」고 하였다...

천희(서기1017년)이래로 군자와 소인의 당론이 있었는데⋯⋯ 공이 퇴조하여 당시 참지직 에 있는 설규(薛奎)에게 글을 주어 가로되 「소인의 졸자는 과오에 범하기 쉬우나 교자는 과오가 없으며 군자로서의 순수한 자는 하비가 없으나 편벽한자는 하비가 있나니 과오가 없는자를 용서하고 하비가 있는자를 버리나니 어찌 유식한자⋯⋯」

원풍년간에 청묘취식법(송조 왕안석의 제정된 법률의 일종으로써 당시 백성간에 고리가 성행되여 차를 막기 위해 나라에서 저율의 이식으로 봄에 푸른 싹이 돋을 때 전곡을 대부하여 추수기에 원리를 반환케하는 법 또 국고가 비여 충당하기 위하여 전답의 푸른 싹을 보고 미리 세금을 부과하든 法)이 있었는데 공이 이 법의 폐지를 주장하고 임금께 극간하다가 실패하고 이에 모든 학사와 더불어 부해하여 동으로 나오셨음⋯⋯

갑자(서기1084년)봄에 상국으로 부터 오는 성초(星軺: 사신이 타는 수레) 친구를 만나서 시를 지어주되 「묻노니 황조의 천자께옵서. 그전 모양 곤룡포에 평안하신지」라고 하여 모군(慕君)의 뜻을 표했다. 사신 친구가 가로되 再昨年에 팔학사가 동으로 출국할때 도성의 사대부들이 서로 차탄하며 말하되 「일찌기 사현(四賢)이 떠나 갈 때에도 애석했더니 또 팔사가 떠나다니」라고 하면서 더욱 애석하게 여겼다고 하다.

 

■죽간선생 행적

 

고려文宗朝에서 관위에 등용하려고 여러번 징초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이단을 배척하고 유도를 밝힘으로써 나의 임무를 삼으니 조야에서 책을 가지고 와서 수업한 자 수천이라⋯⋯

고려肅宗(西紀1096년~1105년사이)朝의 징초에 응하셨음⋯⋯성치를 보도하여 삼한의 인민들이 불교에 물 들었던 것을 일제히 씻어버리고 庠(상)과 序(향학)를 세우고 예악을 밝혔...

강릉보에 모든 학사들이 동래하셨다는 것만 기재되었고 기타행적은 심히 모호하기 때문에 자손된 자로서는 이에 대하여 의혹이 많았었다. 그러던 중 근년에 음죽종인 재기(在起)씨가 林政丞漢浩宅의 임씨보첩을 참고하여보니 「임씨시조팔급은 즉 송조때 한림학사라 群奸小人冀들의 참소한바되어 칠학사인 병부상서유전 이부시랑최호 어사대부송규 태중대부중랑장공덕수 한림권지기로 더불어 부해하여 동국으로 출국하였으니 그때는 바로 고려문종시라」고 했고 또 통천군(강원도의 위치함)의 명승고적인 총석정절벽상에 팔학사성명및 관직함이 차제로 각석되였으며 또 그곳 해상에서 각자가 절시 한구씩을 지어 창화하였는데 그 시가 임씨보첩에 소상히 기재되었으니 강릉보에 기재된바 송조팔학사는 가히 확증히 된다고 할 수 있으나 微裔들이 수문하는데 있어서 광범하지 못했다는 책임만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洪世周氏가 중국사절로 출국할 때에 陰竹宗人 在起가 그에게 大弊(활동비)를 양척선에 실어주면서 긴밀히 부탁하되 「우리 劉姓이 본래 皇朝로부터 동래하였으나 상서공선대세계는 막연하여 기록된데가 없으니 바라건데 유씨세계를 널리 탐문하여 오소서」하였다. 그런데 마침 상서공⋯⋯孫 諱庸이 이부상서의 직위에 있는지라. 한태상황으로부터 상서공에 이르기까지 四十一世가 되나 그 세계기록이 판각으로 되지 않고 잡책에다가 등서하여 왔었으므로 그 후에 그 세계를 이어 수보하려고 하면 제 재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금석지문을 등서본으로는 준신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此를 불신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冬至書狀官의 사명을 띠고 중국으로 출국하는 尹瓚에게 또 부탁하여 劉庸과 교섭끝에 위의 세계판각본을 圖得하여왔은 즉 명춘에는 此에 의준하여 보첩에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公이 冀州道茂山三里에 居住하셨다⋯⋯

 

■고려 때의 기록

고려 충순왕 때에 거타군 북명천면(일명 명산면)덕곡산하 계량동(일명 화지동)에 상서공시문양 호죽간유선생의 묘는 해좌이니 석물이 있는데 신도비 상석이좌 등명석(등모양 이하모두 모양을 표함)이좌동자석 양마석 장군석이 있으며 지석은 상석밑에 매치하였다. 朝家에서 사패지(나라에서 사전할 때 주는 패와 토지수조권을 이양함)사방으로 5리(二㎞)를 급사하였으니 그중에 위토전이 500두락(십만평) 율목이 300주. 대추나무 200주가 들어있고 갯벌 밭이 좌우로 둘러있다. 재실이름은 수송대니 正寢(정침)이 5간이요 동행랑과 서행랑이 각 각3간이며 하마비(말에서 내리라는 표석)가 대문밖에 세워져있다. 재직(재실지키는 사람)이의 성명은 정대옥(鄭大玉)이니 본관이 오천 영일군(烏川: 迎日郡)사람이다.

 

■ 능묘사적의 실기

지나간 병오(헌종12년 서기1846년)에 본손 응상(應相)이 선조의 분묘를 실전한 일로써 여러번 영천군 수령에게 정소하니 그때에 郡사람들이 두 번에 걸쳐 투서로 밀고하되 그 내용인즉 계량동의 劉尙書公 묘와 덕곡산하의 용궁현감 묘가 소연하게 있고 네 곳 산의 송추(소나무,호도나무) 및 사패전토와 향화를 받들 자산과 수세 350양식을 묘직이 정대옥(鄭大玉)이 해마다 사손(嗣孫)택에 납세하다가 본 손이 미약하여짐을 기회로삼아 대옥이 유씨재실에 침주하면서 말리던 산림과 사패전토를 자기소유로 만들고 묘표석과 신도비는 후미진 곳에 파묻고 기타 묘전 석물등을 일일히 빼다가 암매하여버렸고 그상태로 대대로 당가옹(當家翁)이 되었더니 그후 「중국에서 온 대관들의 묘를 개축하라」는 조령이 내리자 鄭家가 겁을 내어 조관석朝官石 교배석交拜石 갑주석甲冑石 망주석望柱石만은 다시 세웠고 비석은 복구하지 않았다. 지금 尙書公墓 계하에 있는 고총은 大玉의 외손 이주관(李周寬)이 범장한 묘이며 근래에 鄭某가 더욱 불량하여 석물을 빼어서 주초 돌 다듬이 돌도 만들고 제방수문석 등을 만들며 전해오던 재실은 별처로 옮겨 변조하였다. 그 후에 鄭某의 집안 수십명 가족들이 몇 해 동안에 몰사하였다. 이는 근린의 대부분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며 또한 기와집 12칸 건물이 비어있으니 사람마다 그 건물을 보고 하는 말이 「鄭某가 폭망한 집이니 아무도 과감하게 들어가 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본군수령 김기석(金箕錫)이 밀고에 의하여 예방관리를시켜 그 사실의 참과 거짓을 시중인들에게 알아보게 하니 시중인 수 천 명이 관가의 사문이 있음을 알고 그 수의 반은 관정에 반은 홍전문 안에 운집하여 「계량동의 劉尙書公 묘가 확실하다는 것을 한입에서 나오듯이 말하고 그 외의 사실도 밀고한 바와 조금도 착오가 없다고 증언하였다. 그리하여 의처를 발굴한바 劉字가 새겨진 석편과 석자가 새겨진 석편 각 일편씩을 상석 밑에서 발견하였다.

 

■묘를 찾게 된 사적

병부상서 죽간선생 휘 전(荃) 자는 원보(原甫) 즉 우리 한국유씨의 鼻祖(시조)이시다. 송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칠학사와 함께 부해 동래하야 초해창주(楚海蒼州)의 팔학산아래 용포리를 택하여 거주하셨으니 즉 고려 문종때라 그 문장과 덕행이 당세의 존경을 받았다. 한림학사 설장수(偰長壽) 대제학 박의중(朴宜中) 서상관 홍사범(洪師範) 대사성 이문정(李文靖) 대제학 박상충(朴尙衷)이 각각 상소하여 포장하되 「동방도학의 창수로서 삼한(三韓)의 구염을 일소하였으니 그 공덕들이 남아 백세까지라도 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1122년(壬寅) 02월 07일 별세하니 향년 72수라. 묘는 영천군 소재지의 북쪽 십리허 명산면 화지동 해좌원에 있다. 진한국부인 롱서이씨(辰韓國夫人 隴西李氏)와 동좌원(同坐原)에 상하장(上下葬)으로 되어 있다.

 

열성조의 전교와 계하에 특히 우전이 있어서 사우를 개성에 건립하였고 전토와 노복을 사급하고 또 예관을 보내여 치제하여 높이 제사하였으며 숭의전에 배향하여 국가와 함께 빛나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손(嗣孫)을 구하여 벼슬을 주고 봉사하도록 하여 대대로 계속 높은 공덕을 보수하였다. 슬프다. 병란을 여러 번 겪고 자손들이 미약해져서 서울에 거주한 후손은 명예와 이익에만 골몰하고 시골에 거주한 후손들은 빈곤에 빠져 선산에 성묘하는 의절에 있어서 너무도 소홀히 한지가 오래되어 4~5백년간이 지나 마침내 실전하는데까지 이르렀으니 애통하도다. 이를 어찌 말로 차마 다 하리요. 불초한 인원(仁源)이가 어렸을 때 선친을 따라서 경북 성주에서 영천군의 북쪽 자천면으로 이거하였는데 겨우 내 나이 12세에 선친께서 숙병으로 병상에 누어 계시게 되었다. 어느 날에 선친께서 나를 보고 흐느끼시면서 가르쳐 가로되 「내가 이미 죽게 되였는데 보다 한 가지 여한이 있다고 하면 다름이 아니라 우리 상서공 선조 묘소가 보첩에 상재되었으나 현지의 실적을 증거 할 만 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현지를 탐사하여 적증을 들어내고 싶으나 돌이켜 보건대 나와 같이 무성의하고 물력이 없는 처지로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니 지하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선조를 뵈옵겠느냐. 그러니 네가 내 뜻의 만분지일이라도 계승하라」하신지라.

 

하잘 것 없는 인원(仁源)이가 선친의 명령을 감당치 못할까 두려워 이로부터 명산(鳴山)에 왕래하는데 자천(慈川)에서 명산(鳴山)의 거리가 20여리라. 그러나 그보다도 그 지방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그 지방의 나그네 생활을 했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손수 만든 수종환약을 여장에 지니기도 했다. 지방 사람들이 청구하는 대로 값을 받지 않고 호의를 베푸니 지방 사람들은 나더러 활협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였으나 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 줄이야 누가 알겠는가? 묘에 對해서는 끝까지 발구하지 않았으나 거기 사는 사람들은 劉陵이 과연 尙書公의 묘가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나 나의 생각으로는 아직까지 확증할만한 증거서류가 없을뿐더러 그 지역에 토착인인 鄭李 양성들은 그 군내의 뿌리박힌 성족들로써 그들이 선묘를 상서공 묘 곁에 중총으로 겹겹이 암장한 자들이라서 만일에 갑자기 묘를 찾는다고 하면 그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입산의 자유를 강압할것은 물론 지방인들의 입을 막을 것이며 일을 저해할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입을 다물고 수 십년을 경과하던 차에 산하에서 나와 가장 친절했던 박씨한 사람이 취중에 무슨 얘기를 하다가 말이 劉陵에 미치자 갑짜기 지석이 「모처에 묻혀있는데 지금에도 그곳에 凸型의 흔적이 있다」는 말이 부지 중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이 말을 듣고도 못들은 척 하였다가 그 뒤 밤에 그곳을 채굴해본 즉 과연 석장광은 주척으로 2척(60센치) 남짓 두께는 주척으로 5촌(15센치)가량이며, 지석이 나왔는데 석면에 새겨있는 자화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보통 지석이란 묘의 계하에 매안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와 같이 엉뚱한 곳에 묻혀있는 것은 鄭, 李들의 소행인 것 인줄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인 즉 묘전에 세워져있던 다른 석물도 모두 치워버렸을 것이며 이는 전적의 물증을 엄닉해버리자는 그들의 흉계에서 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실을 들어 관에 보고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또 무슨 대책을 세워 용간할지도 의문이였다. 때마침 족인 기풍(綺豊)씨가 경북 신령군(慶北新寧郡)의 記室(기실:기록사무를 맡은 직무)에 재직중임을 기회로 그날 밤에 바로 지석을 받들고 신령군을 찾아가니 기풍씨가 지석을 보고 크게 놀라 신령지군(新寧知郡:신령군수)에게 알렸다. 知郡(군수)은 기풍씨와 친척관계가 있는 사이다. 지군이 지석을 동헌대청(東軒大廳)에 놓고 손수 물로 씻어내고 그 지석문을 탁본하여 영천군으로 사실을 조회하여 보았다. 영천군 사림들이 이에 사실을 확인하고 각처 유씨종중에 통문을 발송하였다.

 

계묘(광무6년 서기1903년) 03월 10일을 기하여 묘하에서 자손총회를 개최하고 묘의 改莎(사초)까지도 하였다. 그때에 칠곡군수(漆谷郡守)유응렬(劉膺烈)씨가 서울에 있으면서도 이 일에 대하여 좌지우지하였고 인동에 병주(秉周)씨 와 성주에 응원(應源)씨, 일원(一源)씨 대구에 사과(司果) 병기(秉基)씨 이분들이 손수 삼태기(畚)를 들고 흙을 담아 나르기도 하여 사초 역사는 잘 마쳤으나 한 가지 유감은 자손들의 힘이 약하여 모든 수용에 경제적 난관이 많은 그것이다. 우선 위토답 10두락(位土畓十斗落)을 묘 하인에게 경작시켜 묘제 제향비로 수용케하고 재사 및 석물에 있어서는 근간한 자손유사를 택정하여 관리케하고 또 그로 하여금 각 지방에 파유하여 자손들의 의손금을 모집하여 자금을 조성보완하기로 총회의 결의를 보았다. 그리고 륜장(倫葬)관계가 선결문제이여서 바로 관에 정소하여 정총이위(鄭塚二位)를 굴거하고 계하의 이총일위(李塚一位)에 대해서는 기소중인데 또 다른 무덤(此塚)은 임란때 전몰장병의 초혼장이라고 전해진다. 아~ 슬프도다. 인도가 회명이 있고 만물이 성쇠가 있는 것은 시대적 변천의 이치인 것이거늘, 그러나 우리 선조와 같으신 고충수학(高忠邃學)으로서 그의 묘가 황초에 묻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면 이게 무슨 헤아릴 수 없는 변일까? 아니면 은나라 백이숙제는 주왕에게 간쟁했었는데 천하가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삼는 그날을 당하자 서산에서 자취를 감추고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이치이냐? 우리 선조의 묘가 황초에 묻힌 것도 여기에 비유될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 하늘이 하계를 도와 이 선정시에 우리의 도를 없애지 않을 것인즉 어찌 대현의 묘로 하여금 또 실전되도록 하겠는가? 이제 묘를 찾게 된것은 자손의 성의가 아니요. 하늘이 도움임을 알겠고 또한 감히 인원(仁源)이가 이렇게 찾게한 것이라 감히 말할 것이 아니요 실은 선친의 효감에서라고 할 것이다.

高宗四十年(光武七年西紀一九○三年)癸卯三月三日에 後孫 仁源은 삼가 기록함

 

 

심묘병멱고사실 (묘 찾은 것과 아울러 유고를 찾은 사실)

죽간선생(竹諫先生:諱 荃) 묘소가 영천군 명산면에 있었는데 여러번 난리를 겪고 자손들이 쇠잔해서 묘소를 실전한 것이 삼백년이나 된 것이라. 마침 광무임인(光武壬寅:고종39년, 서기 1902년)년 봄에 자천면(慈川面)에 사는 후손 인원(仁源)이가 다행히 사람들이 손가락질 한곳을 눈여겨보고서 묘아래 가까운 곳에서 지석(誌石)을 찾으니 길이가 두자(한자는 30센치)가 넘고 두께가 반자가량 되며 글자가 소명하게 기록되어 있는지라. 일가인 기풍(綺豊)씨와 같이 실지를 근거로 해서 본고를 군수에게 찾아가서 알린 후에 묘 가까이 있는 정(鄭)가의 두 무덤을 곧 파내고 서울 사는 병두(秉斗)ㆍ응렬(膺烈)ㆍ봉렬(鳳烈)ㆍ한익(漢翌)ㆍ병기(秉基)와 같이 의견을 합하고 정성을 다해 봉분을 쌓고 비석을 다듬어서 묘에 표석을 세웠다.

 

그 다음해 계묘(癸卯:서기1903년)에 인원(仁源)이가 또 죽간선생 유고(遺稿:文集)을 경주 기계촌에 사는 유씨(兪氏)의 집에서 얻었으니 책장이 많이 떨어지고 태반은 좀이 먹은지라.

 

열성조(列聖朝:여러 임금)의 전교(傳敎)와 및 모든 대신들의 상소와 논문은 혹 전폭이 없어졌고 혹 몇 줄씩 없어졌고 글자도 없어지고 성묘(聖廟:임금을 지칭)자 위 아래로 전체가 없어져서 증거가 없고 조자기(曺自奇)가 지은 비문과 시례가(詩禮家)로부터 이하는 전체 없어졌고 년호에는 다만 건(建)자 한자만 있으니 건염(建炎:남송의 년호)인 듯싶다. (※참고)

묘지(墓誌)와 옛날 비문에 다 정헌대부 병부상서(正憲大夫兵部尙書)라 했고 오직 팔학사에 성과 이름은 맑게 기재되어 있고 또 시(詩)ㆍ서(序)ㆍ기(記)가 없어진 것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혹 제목만 있고 글이 없어진 것은 삭제하고 나니 시(詩)가 겨우 백삼십사편이고 서(序)가 하나이고 기(記)가 하나이다.

 

■ 묘지 (지석문)

중국조정의 정헌대부(정이품)행 병부상서 유공 휘 전은 신묘(송인종 황우3년 서기1051년)04월 08일에 출생하시고 임인(고려예종17년 서기1122년) 02월 07일에 별세하시니 향년72세라 배에 롱서이씨는 정경부인으로 수봉했는데 기미(송원풍이년서기1079년) 중국 감숙성롱서현 원서에서 출생하시고 계묘(고려인종원년서기1123년) 06월 07일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45세라 묘는 영양군(경상북도영천군의 고호)의 북쪽 명산면화지동해좌에 상하봉으로 모셔져 있다. 건중병자建中丙子(고려숙종원년서기1096년) 03월 15일에 장자 거타군 견규가 출생하였음(상서공 46세 때임)

 

 

 

■ 신도비문 재일집구본비칙실의

신도(墓道)비문 일집에 실려 있던 구 비문은 유실했음(신도비는 이품이상에 해當함)

정헌대부병부상서문양공죽간유선생의 묘(비 전면의 대자와 두전)

선생의 휘는 전이요 자는 원보요 호는 죽간이요 성은 유씨니 팽성인이라 고려문종때에 중화로부터 칠학사와 아울러 동으로 조선에 건너 오셨었다. 선생께서 개연히 이단을 척벽하고 유도를 널리 천명할 뜻이 있고 그 충후하시고 밝은 덕은 一世에 뛰어난 지라. 충렬왕조(서기1275년~1308년)에 시호를 문양공이라 증하시고⋯⋯. 공민왕⋯⋯. 대제학박의중과 대사성이문정과 대제학박상충등 팔인이 소를 갖추어 가로되 문양공유전은 이에 동방도학의 창수⋯⋯. 옛적 주공소공태공에게 비교하더라도 오히려 동렬이 될 만한데 그 높여 위령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즉 제사의 천신을 궐하였으니 또한 어찌⋯⋯. 임금께 품계하여 예관에게 특명을 내려 제사지내도록 하고 사우를 개성부에 건립하였다.

그리고 또 숭의전(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으니 이조 때 고려태조와 칠왕인 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현종을 제사지내는 사우)에 배향하였다. 배위는 정경부인롱서이씨니 묘는 함께 거타군(영천군의 고호) 북부에 있는 화지동 계량촌 후 해좌에 상하봉으로 모셔있다. 부의 휘는 채니(采) 벼슬은 한림이라 선생으로부터 위로 한태조까지 계대하여 보면 39대 손이 된다. 선생의 맏아들 견규는 평장사를 지내고 거타군을 수봉했으며 그 후 자손을 벼슬하는 반족도 되고 혹은 시와 예를 잘하는 사가도 되었는데 오직 여기에는 종파만을 기록했으니 가로되 ⋯⋯. 建⋯⋯.

平章事 夏城 曺自奇는 삼가 기록함

 

 

■ 묘갈명 소서를 병함

선생의 휘는 전이요 자는 원보요 시는 문양이요 호는 죽간이요 성은 유씨니 한태조의 삼십구대손이요 팽성인이라 송나라에서 벼슬하여 벼슬이 병부상서에 지하여 항직충량함으로써 군소들의 참소한 바 되어 같은 조정에 있던 칠학사와 더불어 바다에 떠서 동래하여 처음 기계에 살으시다가 그 뒤에 동거군으로 이거하셨으니 바로 고려문종때이라 향학을 세우고 도학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삼으니 책을가지고와 학업을 청하는자 수천인이라. 만년에 임금의 징소에 응하여 임금의 정치를 보필하매 그 높은 공훈과 큰 덕망이 해와 별처럼 빛났었다. 모든 대신들이 상소를 논 할제 선생은 이학의 조종이라 추대하고 또 이윤전설과 주공소공에 비유하였다. 문집약천편이 있었는데 책장이 많이 떨어져 유실하고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봉황새의 많은 것 중에 하나 정도이나 천재를 지난 오늘에도 그 선생의 고풍만은 가히 상상할수있다. 선생이 신묘사월에 출생하시고 임인이월에 졸하시니 향년이 72세라. 묘는 동거군계량동에 있으니 즉금비석동이라 배는 진한국부인롱서이씨니 묘는 동원이라 자에 견규는 벼슬이 평장사인데 거타군에 수봉되였고 손에 춘무는 벼슬 판삼사사를 지냈으며 그 뒤로 벼슬이 대대로 끊기지 않았고,

휘 창에 이르러는 우리 태조임금을 보좌했음으로 정사원훈옥천부원군을 봉했고 시를 문희라 했으니 선생의 11대손이라 선생후손들이 팔역에 산재한자 이름이 사환록에 많이 나타나 있으니 유택이 영구불민 한 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여러번 병란을 겪고 자손이 미약하여 묘를 실전한지가 삼백여년이라. 후손 인원이 괴로움을 다하여 찾고 찾아 지석을 근지에서 발견했으니 이 지석문은 우리 선조 평장공 휘 자기(自奇)가 지은바라 이때에 서울에 사는 후손 병두 맹 응렬 봉렬 병태 기풍 한익 병기가 계모와 성의를 합치한 결과 봉축을 새로이 하고 돌을 깍아 묘갈을 세우게 되자. 나에게 명을 촉탁한지라. 스스로 돌이켜 보건대 나이가 늙고 배움이 얕은 내가 어찌 이 일을 감당하겠는가마는 묘지 문이 우리 선조(조자기)의 신필인지라 후손으로서 의리상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위와 같이 찬하였으며 명을 지어 가로되 공맹의 학문이요 이윤전설의 공로로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우시사 공을 중국으로부터 해동으로 보냈네. 세상을 도우고 백성을 길러내니 그 공덕이 사기에 빛났도다. 세상이 여러 번 변천함으로 공의 분묘를 실전한지가 몇 백 년 되었다가 지석을 발굴하고 이에 묘를 찾은 뒤 묘갈을 세워서 공의 위적을 밝게 나타내기로 하고 이에 공의 유덕이 무궁함을 보여주니 기리 천 억년이나 내려갈지어다.

통훈대부 사간원정언 하성(夏城) 조규승(曺逵承)은 삼가지음

 

 

 

■유원보(諱荃)에게 주는 편지 충북 괴산군 증평읍 전창하택 소장 구소수간집

원보가 이미 관제에 구애되는 바가 되지 않음으로 부터 친구간의 교류도 또한 자연적으로 적막하게 되였는데 더구나 마땅히 책무와 이행이 분별하지 못할까 두려움을 걱정함에랴.

그 정상을 가히 알만하구려.

우연히 생각건대 봄철에 만물이 생동하려 함에 옛 도성에 많은 아름다운 경치가 즐거움이 되지만 어찌 다시 가히 골몰하리오. 성리에 빠지고 혹한 자들은 그 노고를 이기지 못하면서도 다만 그 즐거움만을 보고 조금 지식이 있는 이는 겸해서 쇠한 병까지 있으니 이런 일은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하기도 어렵고 유독 원보도 또한 믿는지 안 믿는지를 알지 못하겠구려.

풍편을 인하여 다행히 자주 안부나 전하여서 내 이렇게 간절히 보고픈 마음을 위로해 주게나.

 

구양수  : [ 韓國 國立中央圖書館 所藏品 ] 1권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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