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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劉 門中/ 先祖의香氣

대치 유홍기(劉鴻基)선생

구한말 개화기의 선각자 대치 유홍기(劉鴻基)선생

↑대치 유홍기 선생

이 분은 장성에서 태어나 장성이 본향이면서도 정작 장성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서, 개화파의 3대 스승의 한 분이다. 실학 북학파(이용후생파)의 거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역관 출신 오경석, 의관 출신 유홍기(유대치)는 개혁파 3대 스승이라 한다.

[조부(祖父) 유명제는 북이면 송산 태생, 대치의 묘소도 송산에 있어]


대치(大致)유홍기선생은 유대치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구한말(舊韓末) 개화기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당(開化黨)이라 일컫는 사람들의 스승이자 실질적인 막후 실력자로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개화당 세력이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1884.12.4)이 3일 천하로 끝나고, 그들에 대한 숙청으로 인해 대치 유홍기선생에 대한 기록과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치선생은 1814년 02월 30일 한양(서울)에서 태어났다. 강릉유씨족보(1911년발간)와 강릉유씨가승보(家承譜1953년발간), 강릉유씨대동보(大同譜1994년발간) 등을 종합해보면 대치선생의 8대조(代祖)인 세분(世分)이 장성진원 현령(縣令)을 지낸 뒤로 장성에 터를 잡고 살았다. 대치선생의 조부(祖父)인 유명제(劉命濟)가 상경하여 성수(性修)와 경수(慶修) 두 아들을 두었는데 대치선생은 아버지 유경수와 어머니 신평송씨 사이의 4녀 1남 가운데 외아들로 강릉유씨대동보상 이름은 洪奎(홍규)이다.  

대치선생의 아버지인 둔재(遯齋)유경수는 역관(譯官)으로 한양에서도 손꼽히는 거부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남달리 일찍 개화사상에 눈뜰 수 있었던 것은 역관으로 있던 아버지로부터 중국에서 간행된 여러 가지 신서적(新書籍)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그와 이웃해 살면서 동지이기도 했던 오경석(吳慶錫)이 역관으로 있었기에 그로부터 많은 신서적을 구할 수 있었다. 오경석은 독립운동가 33인 가운데 한사람이며 대치선생의 제자인 오세창의 아버지다. 오경석은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지을 만큼 금석학의 대가였다. 오경석이 대치선생을 아들인 오세창의 스승(塾師)으로 삼은 것(8세부터 16세까지)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대치선생이 언제 어떻게 세상을 마감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이능화가 지은 <조선불교통사>에는 ‘유대치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김의환이 지은 <조선개화당의 막후 지도자 유대치의 활약과 그의 최후>라는 논문에서는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경기도 용문산에 토굴을 짓고 살면서 1890년 경 임종할 때까지 좌선(坐禪)으로 일관하며 살았다’고 쓰여 있다. 한편 강릉유씨 문중에서는 ‘지병이 있던 그가 본향(本鄕)인 장성군 북이면 송산 마을로 낙향 1884년 12월5일 나이 71세로 별세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을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대치선생의 행적을 쫓던 관원들이 대치선생의 묘를 파하고, 그의 시신(屍身)을 부관참시(副棺斬屍)하려 했으나 오씨 노인이 시신 위에 한지를 덮고, 시신에 손을 대면 자결하겠다는 말을 듣고, 그냥 물러갔다고 한다. 대치 선생의 묘소가 송산 마을에 있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줄 후손조차 없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주민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갑신정변의 배경과 의의-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의 바람]

유홍기의 제자 서광범(왼족)과 김옥균(오른쪽)

이들은 명문가 양반이었으나 중인 신분의 유홍기의 지도를 받았다. 각각 양복과 한복을 입고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갑신정변은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었다.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출신 지식인과 양반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다. 김옥균 ·박영효(朴永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등 양반출신 청년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洪奎, 大致)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청나라의 깊은 내정간섭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젊은 개화파)은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빨리 근대 국가를 이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성황후(明星皇后)는 청나라에 의존하여 서양의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개화파와 손잡고 급진 개화파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이에 급진 개화파는 빨리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비상수단을 쓰기로 하고, 청·프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정국이 어수선하자,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우려 했다.

 

갑신정변은 근대적이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 외국세력에 기대어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게 한 점이 실패로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자발적인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또한 개화파의 갑신정변은 10년 뒤인 甲午更張(갑오개혁)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선구적 개화사상가 대치 유홍기선생]

대치선생의 부친은 역관이었으나 그는 한의사(韓醫師)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역관이나 한의사는 모두 중인(中人)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중인인 대치선생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는 어려웠다. 대치선생이 받은 벼슬을 보면, 인산감역(因山監役)과 정부조직개편을 위한 감생청(減省廳)의 실무위원으로 임명된 것이 전부다. 물론 벼슬 경력이 없는 그에게 감생청의 8인 실무위원(정9품직) 가운데 한명으로 임명한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인사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고종의 적극적인 개혁의지에도 불구하고, 감생청의 정리안은 양반관료들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치선생은 양반사회의 근본적인 틀을 깨뜨리지 않고는 결코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대치선생의 사상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개화파의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에 의해 양반을 없애고, 국가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것으로 발전해 갔다.

 

대치선생은 조선사회의 정치적 지배이념이었던 유교에 대한 회의(懷疑)를 갖게 되었고, 불성(佛性)에 의한 평등사상을 강조한 불교에 심취하게 된다. <김옥균전 designtimesp=9449>에 의하면 “대치선생은 원래 역관의 집에서 태어났으나 의(醫)를 업으로 하였고, 깊이 불교를 믿어 도(道)는 높고, 품성은 청백했다. 조선고금의 역사에 통달했으며 변설은 유창하고, 항상 생기에 넘쳤다”고 기록되었다. 대표적인 개화파 승려(僧侶)였던 이동인이 부집존장(父執尊長)이라 하며 집안의 어른처럼 모셨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학덕과 불교에 대한 조회가 매우 깊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치선생과 주변 인물]

대치선생의 스승은 추사(秋史) 김정희다. 동지(同志)였던 오경석이 금석학(金石學)의 대가(大家)였고, 대치선생의 글씨가 명필이었다는 것을 보아도 이를 증명하고 남는다. 아마도 대치선생과 오경석 두 사람 모두 추사의 제자로 짐작된다. 추사(秋史)는 초의선사(草衣禪師) 등 여러 승려들과 교유하며 불교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가진 사람으로 알려있다. 대치선생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 아마 스승인 추사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치선생의 동지로는 역관인 오경석(吳慶錫)과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朴珪壽) 등이 있다. 일부에서는 오경석과 대치선생이 동갑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 박규수가 대치선생보다 일곱 살이 연상인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오히려 나이를 떠나 한 뜻을 가진 동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그의 제자로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고균(古均)김옥균이다. 고균이 대치선생을 만난 것은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고균은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이 때 박규수의 집에서 대치 선생을 만나게 된다. 대치선생의 영향을 받은 그는 갑신정변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불교를 신봉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좌선할 것을 권유했다. 고균은 양반이면서도 양반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며 조선의 개혁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독립운동가며 33인의 한분인 오세창도 대치선생의 제자로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다. 대치선생은 그의 아버지인 오경석과 막역한 동지였고, 어려서는 대치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오세창이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대치선생을 모시고, 가평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치선생을 극진히 모셨는가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서광범, 박영효, 이희목, 이동인 등 개화사상가들이 대치선생의 제자로 알려졌다.

 

[결론]

개화 사상의 선구자 유홍기
북학파 학자였던 박제가는 일찍이 청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서양과도 통상의 길을 터야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통상론을 주장한 적이 잇다. 이규경도 순조 32년인 1832년 영국의 상선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해 왔을 때 허락할 것을 주장한 바 있고, 최후의 실학자라 할 수 있는 최한기 역시 문호를 여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이렇듯 조선 후기의 실학 사상에 뿌리를 둔 개화 사상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개국론으로 모아지게 되고, 개화 사상가들은 문호를 개방하여 하루속히 서양 문화를 수입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개국과 통상론의 선구자로는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 이었다.
그중에서도 개화파의 젊은 인사들을 지도하여 개화 사상을 근대적 정치 운동으로 발전시킨 개화파의 선구적 지도자는 유흥기 였다. 초기 개화파의 근대적 정치 개혁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유홍기는 정치 개혁의 표면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항상 막후에서 활동한 지도자였다.
유홍기는 본관이 한양이고, 1831년 10월 14일 아버지 유익소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홍기고 호는 대치 외에도 여러 개가 있었으며, 본명보다도 호가 보다 널리 알려져 일반적으로 유대치로 불린다.


사회적 신분이 대대로 중인 계급에 속하여 당시 중인들의 거주지인 지금의 관철동 부근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성장하면서 일찍부터 한의가 되어 의술을 생업으로 삼앗지만, 학문과 사상이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 아주 독실한 불교 신도였는데,<김옥균전>에 따르면 대치는 원래 역관의 집에서 태어나 의를 생업으로 하고, 깊이 불교를 믿어 도가 높고 품성이 청백했다고 한다. 학문으로는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를 연구, 편찬햇으며, 세계 각국의 역사에도 통달했다고 한다. 게다가 연설에도 뛰어낫으며, 신체가 장대한데다 홍안백발로 항상 활기찬 행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5위도총부의 사용이라는 정 9품의 관직을 역임했으나, 오래 머무르지 않고 사직한 후 학술과 불교에 심취하여 오직 거기에만 몰두했다. 그가 개화 사상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은 오경석을 통해 전해진 <해국도지> 등의 책을 읽고 세계에 눈뜨고 내정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면서부터였다. 해박한 학식과 교양을 지니고 잇던 그의 주변에는 항상 젊고 똑똑한 인재들이 모여들어 개화 사상과 국정 개혁에 대하여 담론했다.

 


그는 찰방을 지낸 최영원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얻었으나, 불행히도 부인 최씨는 1884년 갑신정변 때 체포되어 옥중에서 병사했다. 그가 개화 사상에 눈뜨게 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역관으로서 같은 중인이며 나이도 같은 오경석과의 만남을 통해서엿다고 볼 수 있다. 오경석은 역관으로서 박규수를 따라 두 차례에 걸쳐 청국으로 사신을 수행했으며, 이를 전후하여 10여 차례 북경을 왕래하면서 각성된 중국 지식인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사상에 눈뜨게 되었고, <해국도지> <중국 견문록>등을 가져와 유홍기에게 권함으로써 세계의 정세와 개화 사상에 눈뜨게 했다.
유홍기의 주변에는 양반 출신의 신진 기예 인사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젊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김옥균,박영효 등의 양반 출신들을 비롯해 중인 오경윤, 군관 윤혁로, 평민 정병하 등이 있었고, 이동인, 탁정식 등의 승려들도 포함되어 있엇다.

 


갑신정변의 주역을 맡앗던 김옥균은 물론, 정부의 요직을 역임한 이종원 같은 이도 그의 개화 사상과 불교 신앙에 영향을 받은 독실한 이들이었다.

 


어느 날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우리 나라의 개혁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오경석은 ⌈먼저 북촌(양반의 거주지)의 양반 자제 중에서 동지를 구하여 헉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라고 답했다. 당시의 전통적 봉건 사회에서는 유홍기 같은 중인 계층은 신분의 제약으로 인해 정치의 전면에서 활약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양반 소장층에 접근해 그들에게 개화 사상을 지도하여 정치 개혁 운동의 선두에 세게 하는 일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유홍기는 우선 20세 전후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김옥균을 1870년경에 만나게 되었고, 이롭2ᅮ터 1884년 갑신정변 때까지 약 14년간 개화 운동을 통한 정치 개혁 운동을 지도하기에 이르렀다. 유홍기는 승려 이동인,탁정식 등과도 친교를 맺어 개화 사상에 눈뜨게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도록 주선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일본의 근대적으로 개혁한 새로운 사회를 시찰하게 했다. 그는 또 정부의 위촉을 받아 외교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유홍기는 정치의 전면에는 나서지 않앗으나 개화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인재를 지도하면서 ⌈백의정승⌋이 라고 불릴 정도로 당시 정치계에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구한말 개화사상가와 친일파는 분명 다르다. 갑신정변이 청나라에 예속되어가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조국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청나라와 긴장관계에 있던 일본의 힘을 잠시 빌고자 했던 것일 뿐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그들이 일본의 힘을 빌고자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친일로 매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개화파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일본의 조선침탈에 항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개화파는 양반과 상놈으로 구별되던 조선사회를 평등사회로 만들고, 근대화를 통한 조국의 부국강병을 꿈꾸던 애국자들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들 가운데 우뚝 서있는 사람이 바로 대치 유홍기선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