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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劉 門中/ 先祖의香氣

잃어버린 유고를 찾다

◆잃어버린 유고를 찾은 사실-세원(世源:19세 경력공)

 

시조님의 유고가 세상에 나타난 것은 기이하게도 후손 인원(仁源:19세 군수공)이 잃어버렸던 시조님의 지석과 묘소를 찾은 다음해인 계묘(癸卯1903)년에 우연하게도 경주 기계촌에 사는 사람으로부터 시조님의 문집을 보관하고 있다는 뜻밖의 제보를 접하니 이곳은 옛적에 선조께서 처음 와서 거주하시던 곳으로 창주용포(蒼州龍浦)와 팔학산(八學山)이 있는 곳이다. 한 걸음으로 경주 기계촌(杞溪村)에 사는 유씨(兪氏)의 집으로 달려가 다 쓸어져 가는 폐고에서 우연히 죽간선생 일집(逸集:문집)을 얻었으니, 아! 이것이 우리 선조께서 남기신 아득한 옛 기록이다.

 

다행이도 한 권 묵은 책자가 천년 뒤 세상에 흘러 떨어져서 좀 먹고 찢어져서 착오도 없을 수 없으나 겨우 수집하였으니 열성조(列聖朝:여러 임금)의 전교(傳敎)와 많은 대신들의 상소와 논문이 혹은 전폭이 없어졌고 혹은 몇 줄씩 없어져서 글자도 없어지고 성묘(聖廟:어떤 임금을 지칭)자 위 아래로 전체 없어져서 증거가 없고 조자기(曺自奇)가 지은 비문과 시례가(詩禮家)로부터 이하는 전체가 없어졌고 년호에는 다만 건(建)자 한자만 있으니, 건염(建炎:송나라 년호)인 듯 추정되었다. 문집 내용 중 묘지(墓誌)와 옛날 비문에는 시조님을 칭하기를 모두 정헌대부 병부상서(正憲大夫兵部尙書)라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팔학사에 성과 이름은 맑게 기재되어 있었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곳으로 보아 시(詩)ㆍ서(序)ㆍ기(記)가 없어진 것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문맥이 이어지지 않는 곳은 결(缺)로 표시하고 혹 제목만 있고 글이 없어진 것은 삭제하고 나니 시(詩)가 겨우 134수이고 서(序)가 하나이고 기(記)가 하나인데, 그 고상하고 옛 다운 충담(沖澹)한 기운이 멀리 세속을 떠난 격조 높은 문장이다. 또 칠학사(七學士)에게 준 시(詩)와 이영전(邇英殿)에 황제를 모셨던 일 등을 소상하게 알 수 있으나 다만 벼슬에 계실 때 지은 시가 중국에 계실 때의 작품인지 동국(고려)에 오신 후의 작품인지 판별 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라고 세원(世源)은 전언한다.

 

1903년 부터 각고의 노력끝에 죽간집 목판이 완성되어 행여 후손들에게 잊혀질까 염려하여 어려운 재정사정속에 소량의 책자를 1911년 신해에  간행하였고 세원(世源)공께서 일집변론에서 그 소회를 후손들에게 전언(傳言)한다.

 

1924년 세원(世源)이 별세하고 아들 秉瓘(병관)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기신 훈계를 이어받아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여 선조의 덕업을 받듦에 정성이 있어 시조 죽간공의 문집을 독자로 부담하여 간행하고 반포하였으며, 돌아가신 아버지의 문하에서 수학한 여러 유생들과 더불어 제오정(霽梧亭)을 건립하였고 죽간공문집(竹諫公文集) 목각판을 이 정자의 누각 위에 장치하였는데 그 소재는 영덕군 달산면 인곡리(盈德郡達山面仁谷里)이다.

"죽간집-목판본" 기탁보존
(2016.05.20)
 
경북 영덕군 달산면 인곡리 제오정에 모셔져 있던 "죽간집-목판본"이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간에 이전 기탁되었습니다.

그동안 보존시설이 변변치 않은 제오정에서 긴 장고의 세월을 견디어 온 "죽간집-목판본"을 더 이상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시설로 이전하여 보존키로 한 "유태호" 종친의  결단은  백번 잘 하신 선택이라 사료됩니다.

이제 앞으로 도시조 할아버님의  흔적 "천년의 향기"가 그야말로 영원히 빛을 발하며 후대에 길이길이 빛날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참고하시고 관람은 2016년도에 전시준비를 마치고 2017년 부터 관람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관람을 하시려면 먼저 유태호 종친께 연락을 하시어 안내를 받는 것이 좋을 듯하며 아래 연락처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연락처>
유태호 종친: 010-9365-6639

한국국학진흥원(국학원)
전화: 056-851-0800,0700
주소: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서부리)

아래 문건 사본은 "유태호" 종친께서 2016.09.30 저에게 보내온 기탁 확인 문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