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문양공 사적을 찾다.
◆의물 및 사패지-고려실기(麗代實記)
고려충순왕 때에 거타군 북명천면(일명 명산면明山面) 덕곡산하계량동(일명 화지동花枝洞)에 상서공 시 문양 호 죽간 유선생의 능묘가 있으니, 해좌(亥坐)이다.
이곳에 갖춰진 석물은 신도비, 상석이좌, 등명석이좌, 동자석, 양마석, 장군석이 있으며 지석은 상석 밑에 묻었다. 사패지(賜牌地-인재가 죽었을 때 나라에서 주는 땅과 토지소유권문서)는 사방으로 오리(2㎞)까지 이며, 그 안에는 위토전이 오백두락(10만평)이고 밤나무가 200주이며 대추나무가 200주가 들어있고 개펄 밭이 좌우로 둘러있다.
재실 이름은 수송대(愁送臺)니 正寢(정침)이 5칸(五間)이요, 동행랑(東行廊)과 서행랑(西行廊)이 각각 3칸이며 하마비(말에서 내리라는 표석)가 대문밖에 세워져있다.
재직(齋直-재실 지키는 사람)을 맡은 이는 정대옥(鄭大玉)이니 본관은 오천(烏川)이며 영일군 사람이다.
◆잃어버린 묘를 찾은 사실-인원(仁源:19세 군수공)
죽간선생(竹諫先生:諱 荃) 묘소가 영천군 명산면(북명천면)에 있었는데 여러 번 난리를 겪고 자손들이 쇠잔해져 돌봄이 소홀하여 묘소를 실전하니 그 기간이 300백년이다. 삼백년이나 지나 마침 광무임인(光武壬寅:고종三十九년, 서기1902)년 봄에 자천면(慈川面)에 사는 후손 인원(仁源:19세 군수공)이 아버지 상순(尙淳)의 유언을 받들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찾아보던 중 다행히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질 한곳을 눈여겨보고서 묘 아래 가까운 곳에서 지석(誌石)을 찾으니 길이가 두자(약 60Cm)가 넘고 두께가 반자(15Cm)가량 되며 글자가 소명하게 기록되어 있는지라. 일가 사람인 기풍(綺豊)과 같이 현지 사실을 근거로 해서 본 고을 군수에게 알려 조사하여 우리 시조 묘가 틀림없음이 밝혀내고 송사를 통해 확정 판결이 되었다.
이때가 광무7(1903)년이고 이 사실이 황성신문 3월 9일자 3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근거로 가까이 있는 정(鄭)가의 두 무덤을 곧 파내고 서울 사는 종친 병두(秉斗)ㆍ응렬(膺烈)ㆍ봉렬(鳳烈)ㆍ한익(漢翌)ㆍ병기(秉基)와 같이 의견을 합하고 정성을 다해 봉분을 쌓고 비석을 다듬어서 묘에 표석을 세웠다. 지석과 함께 묘소를 다시 찾은 것이 임인년(1902)인데 선조님께서 돌아가시던 그 해도 임인(壬寅서기1122)년 이니 밝으신 정령(精靈)께서 도우시어 연운(年運)과 서로 부합하심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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