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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劉 門中/ 先祖의香氣

천년향기를 따라가다...

죽간 선생의 삶과 문학 『천년의 향기』를 펴내며 / 유길종(劉吉鐘)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죽간선생 유집(遺集)이 마침내 천년의 향기로 새롭게 태어났다. 죽간선생이 동도(東渡)하신지 천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천년이란 세월은 강산이 100번이나 변하는 시간이니 참으로 긴 세월이다. 이 오랜 시간을 죽간선생의 시문은 서고에서만 머물고 있었다.

 

문양공 죽간(竹諫) 유전(劉.)선생은 중국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40세손으로서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정헌대부 병부상서를 지내셨다.

 

충직(忠直)한 도(道)가 조정에서 용납되지 않자 마침내 뜻을 같이한 칠학사(七學士)와 함께 동국(東國)에 오시니, 이 분이 우리나라 유(劉)씨의 동도시조(東渡始祖)가 되신다. 그때가 고려 문종(文宗) 36년(1082)이다.

 

선생의 유집(遺集)이 세상에 나타나기는 최근세의 일이다.

계묘년(癸卯, 1903)에 후손 인원(仁源) 공(公)이 우연히 영일군 기계촌(杞溪村)의 유(兪)씨 집 오래된 상자에서 선생의 천년 유집(遺集)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 그러나 찾은 유집마저도 태반은 부스러지고 좀이 슬어 이지러지고 빠진 글자가 많아 겨우 시(詩)와 서(序) 기(記)뿐이었다.

당대의 훌륭한 한(漢)학자인 후손 세원(世源) 공은 이 유고(遺稿)가 크나큰 선조의 정신과 철학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고, 간행을 서둘러 판각본(板刻本)을 만들고, 이어서 신해년(辛亥1911)에 시 135수, 서(序) 한 편, 기(記) 한 편의 ≪죽간선생일고(竹諫先生逸稿)≫를 출간했으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없지 않다.

 

지나온 천추(千秋)의 세월, ≪죽간선생일고≫가 새롭게 번역되어 ≪천년의 향기≫로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됨이, 마치 선생의 고아(高雅)한 풍모(風貌)를 가까이에서 대한 듯 벅차오른 감격을 억누를 길 없다.

특히, 편집에 있어 한문본(漢文本) 시(詩)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감안, 현대감각을 살리면서도 역사적 고증 차원의 주역과 해설을 붙여 시를 음미(吟味)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문득, 세원조(世源祖)의 일집 발문(發文) 끝자리에 붙인 한 구절이 생각난다. “훗날 조금이나마 형편이 나아지고 조리와 두서가 있게 되기를 기다렸다가 많이 인쇄하여 배포할 기약으로 삼는다”라는 염원을 천년이 지난 오늘의 후손들이 이루어 낸 것 같아 가슴 뿌듯하다. 선생의 시 속에 흐르는 사군(思君)과 우국애민(憂國愛民) 사향(思鄕)과 사우(思友) 그리고 산수(山水)를 즐기던 아취(雅趣)와 뜨거운 충정(忠情)이 담긴 『천년의 향기』가 역사와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만인의 애독서(愛讀書)로 다가와서 시문학(詩文學)연구에도 크게 이바지하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국역본이 발간되기까지 죽간선생의 시(詩)가 훌륭해서 번역을 맡겠다던 강성위 박사님, 이 좋은 시가 어디에서 나왔느냐며 흔쾌히 감수를 맡아주신 서울대 김용직 명예교수님, 공직에 바쁜 가운데 편집을 주간한 유영문 종친의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우리 대종회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아낌없이 도와주신 광주 유상종 종친의 출판비 헌성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풍요로운 이 가을에 오늘따라 해천재의 골 깊은 기와지붕에 햇볕이 따사롭게 느껴진다.

계사(癸巳)년 시월에 영천 구인재(求仁齋)에서

 

천년의 긴 잠에서 깨어 났으니 / 김용직(金容稷,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회원)

-竹諫 劉. 先生의 사화집(詞華集) 출간에 부쳐-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한시 양식(漢詩 樣式)이 차지하는 체적(體積)은 참으로 듬직하며 또한 보람에 가득 차 있다. 그 제작, 발표에 참여한 이름에는 우리 예술과 지성사에서 별자리를 이룬 분들이 매우 많았다. 그들이 빚어낸 미학적 성과는 단연 다른 분야를 뒷전에 돌리고 남을 만한 것이었고 그 솜씨가 빚어낸 품격과 향기 또한 다른 봉우리와 골짜기를 발치에 거느린 웅봉 거악(雄峰 巨嶽)의 느낌이 있는 것이다.

 

여기 사화집(詞華集)의 간행과 함께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죽간 유전(竹諫 劉.) 선생이 바로 그런 한시작가(漢詩作家)의 한 분이다. 선생은 우리나라 출신이 아니라 한족이 세운 송(宋)나라 태생이었다. 일찍 그 조정에 벼슬하여 정명(正名), 지치(至治)의 올곧은 벼리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어지러운 상황, 여건이 그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로하여 선생은 고국을 등지고 고려에 귀화하였으며 남다른 인품과 뛰어난 식견으로 국리민복(國利民福)에 기여하는 삶을 사셨다. 아울러 그 독특한 내면세계를 차원 높은 생각과 가락에 담아 오늘 우리에게 아름다운 말과 가락의 시를 끼치신다.

 

지금 남아 전해지는 선생의 시는 절구와 율시들로 그 수는 통틀어 135수다. 이제 그들을 유형화해보면 대충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가 성의정심(誠意正心), 외곬으로 마음을 갈고 닦아 하늘과 땅 사이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하는 내용을 담은 시이며, 다른 하나가 물아일여(物我一如), 수기찰물(修己察物)의 겨를에 느낀 순응조화(順應調和)의 경지를 읊은 작품들이다.

 
선생의 시에서 셋째 유형이 되는 작품들이 스스로 버리고 떠나온 고국(故國)에 대한 그리움의 정을 실어 편 것들이다. 이런 경우의 좋은 보기가 <늦은 가을 중원의 옛 친구를 생각하며(晩秋憶中原故舊)>이다.

 

바다를 뛰어 넘어 돌아가지 못하느니       不能超海去

고국 떠나 이리도 오래되었네                落落久有分

한갓되게 시름낀 꿈만이 있고                惟有勞勞夢

서풍에 구름만 북으로 가네                   西風渡北雲

 

이와 아울러 다음으로 손 꼽아야 할 것이 선생의 정신세계다.
이 단계에서 선생의 내면세계는 이미 시정속류(市井俗類)의 차원 너머에 있었다. 스스로가 택한 제이(第二)의 조국(祖國) 고려조정에 출사(出仕)하면서 전심전력(專心全力) 정치개혁과 예속 광정(匡正)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와 아울러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은원(恩怨)의 차원을 넘어 맑고 고즈넉한 가락으로 탈바꿈하였다. 선생의 시가 갖는 또 하나의 특징적 단면이 그 법식(法式) 지키기에 있다. 한시(漢詩), 특히 금체시(今體詩)로 지칭되는 절구(絶句)와 율시(律詩)는 정확하게 압운을 써야함은 물론, 각 행의 자수율과 함께 평측(平仄)을 가려서 써야 하는 양식이다. 위의 보기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선생의 시는 그 모두가 그런 작시(作詩)의 규범을 한 치도 어긋남도 없이 지킨 것이다.


지금 우리는 창작이 자유라는 이름 아래 너무나 지나치게 파격을 일삼는 시가 범람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중이다. 예술과 시를 내세운 가운데 한갖되게 방종과 광태가 물결치는 세상을 산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술과 문학의 본령(本領)은 방종과 일탈이 아니라 이성을 전제로 한 절제며 질서화가 아닐 것인가.

이 당연한 논리가 인정되는 자리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고전문학기에서 한 갈래를 이룬 한문시이다. 이제 죽간 선생(竹諫 先生)의 시가 그 전범(典範) 가운데 하나가 됨은 이미 앞에서 넉넉하게 확인한 바와 같다.

이제 선생이 가신지 강산을 열에 열갑절을 바꾼 세월이 아득히도 흘러가 버렸다. 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다시 발굴, 소개되는 것이 선생의 이 사화집이다. 이 문화와 문학의 성사(盛事)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찬사와 박수를 아낄 것인가. 앞으로 우리 시사와 문학사의 갈피마다 죽간 유전(竹諫 劉.)의 이름 넉자와 함께 선생의 작품들이 뚜렷이, 그리고 큼직하게 특필(特筆)되어 나오기를 빌고 바랄 따름이다.


죽간선생의 삶과 문학 / 문학박사 강 성 위(姜聲尉) 

 

1
애초에 사람이 있고 시(詩)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은 가도 시는 남아, 천고(千古)의 세월 후에도 그 사람을 알게 해주니 어찌 시가 위대하지 않겠는가! 옛날에 어느 학자가 시를 논하여 ‘시품인품(詩品人品)’이라 하였다. 시품은 인품에서 비롯된다는 이 말은, 시를 통하여 그 사람의 사상과 감정, 그리고 그 인격까지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책에 수록된 죽간(竹諫) 유전(劉.) 선생의 시야 말로 ‘시품인품’이라는 고대 문학 담론(談論)에 더없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선생처럼 솔직하고 담백하게 자신의 일상적인 삶과 생각, 심지어 그 인격까지도 고스란히 시 속에 투영시킨 시인들이 그리 흔하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천년이라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이 시문집1의 저자인 죽간 유전 선생은 고려(高麗)에 귀화하여 우리나라 유씨(劉氏)의 도시조(東渡始祖)가 된 송(宋)나라의 관리(官吏)이자 학자였다.

 
선생의 자는 원보(原甫)이며 죽간은 그의 호이다. 송 인종(仁宗) 신묘년(辛卯年 : 1051) 4월 8일에 한고조(漢高祖)의 40세손(世孫)으로 태어나 정헌대부(正憲大夫)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굳건하고 정직하였으며 학식과 도량이 깊고 넓었다. 구경(九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물론 천문지리(天文地理)·복서(卜筮)·의약(醫藥)에 이르는 책까지 두루 통달하여, 사람들이 세상을 경륜(經綸)할 통재(通才)로 칭송하였다. 일찍이 집현전(集賢殿)에서 조정의 음악을 논정할 때, 황제가 환관(宦官)을 참여시키자 선생이 극렬하게 간(諫)하기를, “환관이 직언(直言)을 배척하는 것은 제왕(帝王)의 성명(聖明)을 막고, 천하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라 하였다. 붕당(朋黨)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자 선생이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소인 가운데 간교한 자는 과오(過誤)가 없는 듯하고, 군자 가운데 치우친 자는 하자(瑕疵)가 있는 듯합니다. 과오가 없는 듯하다 하여 마침내 그를 너그럽게 대하고, 하자가 있는 듯하다 하여 마침내 그를 버리는 것이 어찌 식견이 있는 자가 할 일이겠습니까?”라 하였다. 선생은 충간(忠諫)이 조정에서 끝내 용납되지 않자 뜻을 같이 하는 칠학사(七學士) 임팔급(林八汲), 설인검(薛仁儉), 허동(許董), 송규(宋圭), 최호(崔.),권지기(權之奇), 공덕수(孔德狩)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왔다. 처음에는 기계(杞溪:月城郡)에 살았으나 후에는 동거군(東居郡 : 永川郡)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이때 선생의 나이는 서른둘로 고려 문종(文宗) 36년이자 송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豊) 5년인 1082년이었다.


동래한 이후에 선생은 분발하여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유가(儒家)의 도(道) 밝히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삼아, 학교를 세우고 예악(禮樂)을 진흥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후대의 학자들이 선생을 동방(東方) 성리학(性理學)의 비조(鼻祖)로 추앙하고, 임금에게 주청(奏請)하여 숭의전(崇義殿)에 배향(配享)되도록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신도비문(神道碑文)>과 <행록(行錄)> 등에서, “만년에 부르심에 응하여 임금의 정치를 보좌(補佐)하고 인도(引導)하였다.”고 하며 선생의 출사(出仕)를 만년의 일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동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도 벼슬에 몸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근거는 친구인 중국 사신과의 상봉과 작별을 다룬 시에서 찾을 수 있다.

 

선생은 <봉상국성초고인(逢上國星.故人)>에서 황제의 안부를 물으며, “곤룡포 드리우고 여전히 평안히 계시온지?〔平安依舊袞裳垂〕”라 하였고, <송상국고인(送上國故人)>에서는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로, “해동의 조정에 와 있더라고 말해 주시게.〔爲言來在海東朝〕”라 하였다. ‘의구(依舊)’라는 말은 “옛 모양과 다름이 없다, 옛날 그대로 변함이 없다.”는 뜻이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시어(詩語)가 결코 아니다. 또 ‘재해동조(在海東朝)’는 벼슬하고 있을 때가 아니면 결코 쓸 수 없는 표현이다. 선생이 동래할 당시 송나라 황제는 신종이었는데, 신종은 선생이 35세가 되던 해인 108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7년 동안은 어린 철종(哲宗)을 대신하여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수렴청정하였으니, 선생이 친구인 중국 사신과 만나 황제의 안부를 물은 것은, 동래한 해인 1082년에서 1085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선생이 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것도 모르고 물어본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사람의 정리(情理)와 너무 동 떨어지는 것이 된다. 자신이 모셨던 황제의 서거 소식을 사신인 친구를 통해 알고도 살아있는 황제인 듯 시에서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당시황제가 신종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철종이 될 수밖에 없는데, 제위(帝位)에 오르는 모습도 본 적이 없는 어리거나 젊은 황제의 안부를 물으면서 ‘의구(依舊)’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뜻이 되니 이 역시 어불성설(語不成說)일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이 두 편의 시는, 선생이 고려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고려의 조정에서 벼슬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환기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임인년(壬寅年 : 1122) 2월 7일에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3.

이 책은 기본적으로 본문에 해당하는 죽간 선생의 ‘시문’과 선생의 삶은 물론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이 선생의 유고(遺稿)라면, 부록은 그 유고를 뒷받침할 자료가 되는 셈이다. 선생의 시문을 개괄하기에 앞서 우선 팔학사의 동래(東來) 시기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억고국(憶故國)>이라는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예전에 이영각(邇英閣) 자리 더럽히고    昔.邇英席

외람스럽게도 성주의 지우(知遇) 입어    猥蒙聖主知

벼슬이 가의의 자리로 옮겨가던 날은     官遷賈誼日

어가(御駕)가 풍당 앞을 지날 때였지.    輦過馮唐時

은혜에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고는        未效涓埃報

강호를 떠돌 일 기약하게 되었다네. .    尋湖海期

여러 해 나그네로 벼슬한지 오래니       經年旅宦久

어느 날인들 돌이켜 생각하지 않으랴!    何日不追思

 

이 시는 죽간 선생이 고려에서 벼슬을 살면서 조국인 송나라를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원문의 ‘이영석(邇英席)’은 ‘이영각(邇英閣)의 자리’라는 말로, 황제가 학식이 높은 신하들과 학문 등을 논하는 이영각의 경연(經筵)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이영각은 송나라 인종(仁宗) 경우(景祐) 2년(1035)에 설치된 전각(殿閣)이다. 오늘날 팔학사 후손의 문중마다 시조(始祖) 동래설(東來說)이 분분하지만, 이 시를 근거로 살피자면 동래 시기가 송나라 인종(仁宗), 고려 문종(文宗) 이후가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죽간 선생의 시는 도합 136수이다. 그 가운데 오언절구(五言絶句)는 총 34수인데 <유계림사증법려(遊鷄林寺贈法侶)>는 3수로 구성된 연작시이고, <등계림봉황대(登鷄林鳳凰臺)>와 <만추억중원고구(晩秋憶中原故舊)>는 각기 2수로 구성된 연작시이다. 오언율시(五言律詩)는 총 35수로 연작시는 없다. 다만 <춘야여제빈료대작(春夜與諸賓僚對酌)> 뒤에 보이는 <재첩(再疊)> 시는 논자에 따라서는 연작시로 볼 수도 있다. ‘재첩’이란 같은 주제로 시를 거듭 지을 때 두 번째 시의 제목으로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칠언절구(七言絶句)는 총 39수이다. 연작시는 없지만 <지(紙)>, <필(筆)>, <묵(墨)>, <연(硯)>을 읊은 시 4수는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노래한 것이므로 연작시라 칭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칠언율시(七言律詩)는 총 28수이며 역시 연작시가 없다.

 

≪죽간일고(竹諫逸稿)≫의 편배(編排)가 시형(詩形)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애초의 유고집(遺稿集)에는 고체시(古體詩)2와 장단구(長短句)3 등이 분명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시 또한 선생이 지은 근체시(近體詩)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선생의 시(詩)가 양적으로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용상으로는 다양한 경향성을 잘 보여준다. 가슴속에 고인 갖가지 회포를 읊은 영회시(詠懷詩)와 철학적인 이치를 설파한 설리시(說理詩), 역사를 소재로 다룬 영사시(詠史詩), 물상(物像)을 음영(吟詠)의 대상으로 삼은 영물시(詠物詩) 등이 두루 갖추어져 있는데, 대부분의 시인들 시가 그러하듯 영회시가 분량 면에서 가장 많다. 선생의 영회시는 사군(思君)과 우국애민(憂國愛民), 사향(思鄕)과 사우(思友) 혹은 교유(交遊)를 주제로 한 시가 두드러진다.

 

★고체시(古體詩) : 당나라 때 격률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근체시(近體詩)가 완성되고부터 이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된 된 말이다. 근체시 성립 이전의 시는 물론, 근체시 성립 이후의 시 가운데 근체시의 격률에 부합되지 않는 시까지 두루 포괄한다.

★장단구(長短句) : 한 편의 시 안에서 장구(長句)와 단구(短句)를 함께 사용한 시라는 뜻이지만, 주로 사(詞)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사는 중국의 당대(唐代)에 발생하여 송대(宋代)에 유행하였던 중국 운문의 한 양식이다.

선생의 시는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자연스러우며 군더더기가 없다. 그리하여 맑고도 깨끗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 기상은 고고(高古)하여 속세를 멀리 벗어났으나 가슴속 충정(忠情)은 언제나 뜨거웠고, 벗이나 지인에 대한 정의(情誼)는 늘 봄 햇살처럼 따뜻하였다. 또한 슬픔과 걱정, 기쁨과 즐거움조차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여 결코 넘치는 법이 없었다. 시를 읽노라면 그러한 선생을 대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분명 들게 될 것이다.

 

선생이 지은 산문(散文) 가운데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작품으로는 서(序) 1편과 기(記) 1 편뿐이라 아쉽게도 그 면모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길이 없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부해소서(浮海小序)>와 <수송대기(愁送臺記)>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도록 한다.

 

<부해소서>는 ‘바다에 배를 띄운 일에 대한 짧은 글’ 정도로 옮길 수 있는데, 선생이 동래한 직후에 이를 기념하여 지은 글로 보인다. 제목에 ‘서(序)’라는 글자가 있다고 하여 무슨 책의 서문(序文)이라는 뜻은 아니다. 선생이 ‘부해(浮海)’를 결행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지만, 정신적인 이유는 공자(孔子)가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서 떠나리라.〔道不行 乘.浮于海〕”고 한 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와야 했던 선생의 서글픔이 언어로 묘사되지는 않았어도 읽은 이의 가슴에 언외(言
外)의 뜻으로 다가온다.

 

<수송대기>는 수송대가 완성된 후에 그 대(臺)를 위하여 선생이 쓴 기문(記文)인데, 기문의 주체가 선생으로 된 걸로 보아 대(臺)가 선생 개인의 소유가 아니었다면 선생이 그 축조(築造)를 주도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대는 건물 형식이 아니라 돈대(墩臺)4 형식이었을 공산이 크다. 고증에 의하면 오늘날 영천시 창구동에 있는 조양각(朝陽閣) 자리가 수송대였다고 한다. 대의 이름인 ‘수송(愁送)’은 동래한 일로 인한 시름[愁]을 보낸다[送]는 뜻이다. 대를 영욕(榮辱)과 희비(喜悲)를 잊는 바탕으로 삼아, 분수(分數)와 천명(天命)을 편안히 여기고 명리(名利)를 버리고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고자 하였던 선생의 염원이 잘 나타나 있는 글이다.

 

4.

이제 부록(附錄)에 수록된 시문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지석가(誌石歌)>는 정진구(鄭鎭九)가 지은 40구 286자로 구성된 가행체(歌行體)5의 시로, 수백 년 세월 동안 실전된 채로 있었던 죽간 선생의 묘소를 안타까워하면서 지석의 발견으로 인해 다시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된 것을 매우 감동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선생의 영령(英靈)도 하늘에서 기뻐하는 듯하니 후손된 자들이 조상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 하였다.

 

★돈대(墩臺) : 경사면을 절토(切土)하거나 평지에 성토(盛土)하여 만든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말하는데, 분수·연못·화목(花木) 등이 조성되는 조망을 위한 돈대와 성곽이나 변방의 요지에 구축하여 총구를 설치하고 봉수시설을 갖추는 방위를 위한 돈대가 있다.

★가행체(歌行體) : 작품의 구절 수에 제한이 없고 격률(格律)이 비교적 자유로우며, 한 구절에 들어가는 글자 수도 일곱 글자를 기본으로 하지만 중간에 글자 수가 다른 구절이 삽입되기도 하는 일종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일집가(逸集歌)> 역시 가행체의 시인데 50구 350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은이는 조우현(曺禹鉉)이다. 전반부에서는 죽간 선생의 빛나는 이력을 묘사하고, 후반부에서는 ≪죽간일고≫에 수록된 시를 개괄적으로 평하여 예찬하는 한편, 이 책을 세상에 영원히 전하여 “후인이 오늘 보기를 지금 사람이 예전 보듯이 하라.[後之視今今視昔]”는 당부의 말을 건넸다.

 

<신도비명 병소서(神道碑銘 幷小序)>는 죽간 선생의 후손인 군수(郡守) 한익(漢翼)의 위촉으로 당시 의정부(議政府) 의정(議政)이었던 해평(海平) 사람 윤용선(尹容善)이 대한제국(大韓帝國) 광무(光武) 7년(1903)에 지은 비문인데, 근본(根本)이 굳어 지엽(枝葉)이 무성하다는 비유를 통해 선생의 덕행(德行)과 후손들의 보은(報恩)을 기리고 있다.

 

<행록(行錄)>은 후손 세원(世源)의 위촉으로 김해(金海) 사람 배경봉(裵慶鳳)이 실제 사적(事績)을 살펴 죽간 선생의 언행을 기록해둔 글인데, 동래(東來) 이전의 일이 비교적 소상하게 실려 있다. 또 선생의 시를 논하여 <부해(浮海)>와 <제수송대(題愁送臺)>, <자경(自警)> 이 세 편의 절구(絶句)만 보더라도 선생이 학문을 한 요체(要諦)와 군주를 사랑한 충정(忠情)을 알 수 있다고 한 지적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능묘사적실기(陵墓事蹟實記)>는 죽간 선생의 묘소가 발견될 무렵에 영천군수(永川郡守)로 재직하였던 김기석(金箕錫)이, 일찍이 선생의 후손 응상(應相)이 올렸던 소장(訴狀)과 군민(郡民)의 투서(投書) 및 군(郡) 밖의 다른 곳에서 고(告)한 글, 군민들의 증언, 묘소에서 발견된 석편(石片)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선생의 묘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작성한 일종의 공문서(公文書)이다.

 

<일집발(逸集跋)>은 죽간 선생의 묘소와 유고집을 찾아내고, ≪죽간일고≫를 세상에 선보이는 데 가장 공이 컸던 후손 세원(世源)이 신해년(辛亥年 : 1911)에 지은 ≪죽간일고≫의 발문이다. 조상을 추모하여 기리고자 한 세원의 절절한 정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일집변론(逸集辨論)>은 후손 세원이 <일집발> 말미에 부록 형태로 붙여둔 것을 역자가 분리시켜 따로 항목으로 삼은 것이다. 변론이란 시비(是非)를 분별(分別)하여 논한다는 말인데, 세원이 ≪죽간일고≫를 엮을 때 낡은 책의 결손(缺損)을 임의로 추정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힌 글이다.

 

<감모음(感慕吟)>은 감명을 받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읊은 시라는 뜻으로, 죽간 선생의 묘소와 유고집을 찾고 나서 유고집을 책으로 엮을 즈음에 당시 선비들이 지은 축하시를 모아놓은 것이다.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하성(夏城) 사람 조규승(曺逵承)이 지은 시를 원운(原韻)으로 삼고 있으며 도합 25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1편이 오언율시(五言律詩)이고 나머지는 모두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그리고 말미의 5수는 선생의 후손들이 지은 것이다. 다른 가문(家門)의 사람들이 지은 20수의 시는 의례적인 찬사가 곁들여지기는 했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선생의 삶과 시문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에, 선생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상당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5.

이 책을 읽는 이들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면, 죽간 선생의 묘소를 찾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쓰신 분들이나 어려운 와중에서도 ≪죽간일고≫를 엮으신 분들, 그리고 또 오늘에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앞장서서 동분서주하며 심력(心力)을 다하신 강릉유씨대종회 유길종(劉吉鐘) 회장님을 비롯한 여러 후손들의 마음이 기실 한 가지라는 점이다. 조상의 높은 뜻과 학문을 기리고자 책을 엮고, 다시 번역본을 내는 것이 어찌 그저 종이 뭉치나 보태는 부질없는 일이겠는가? 이러한 정성들은 하나의 감동으로 살아나, 물질로는 결코 가르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후손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각인(刻印)시켜 줄 것이 분명하다.

 

2013년 9월

문학박사 강 성 위(姜聲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