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주사(將進酒辭)
한 잔(盞) 먹새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곳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네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쟈할고.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제, 뉘우친달 엇디리.
* 곳 것거 : 꽃 꺾어 * 산 놓고 : 술잔 수를 헤아려 두고
* 주리혀 : 졸라매어
* 유소보장 (流蘇寶帳) : 곱게 꾸민 상여. 유소는 상여에 다는 오색실, 보장은 화려한 포장
* 우러레나 : 울면서 가나
* 어욱새 : 억새풀 * 속새 : 속새풀
* 덥가나무 : 떡갈나무 *백양(白楊)수페:무덤속에 * 가기곳 가면 : 가기만 가면
* 쇼쇼리 바람 : 회오리바람 * 잔나비 : 원숭이
* 파람 : 휘파람 * 엇디리 : 어찌하리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술잔 수 셈하면서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에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꽃상여에 만인이 울며 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쌀쌀한 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 꼬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때 후회한들 무엇하리
(해설)
술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나무 가지 꺾어서 잔 수를 헤아리며 끊 없이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으로 덮어서 졸라매고 가든 아름답게 꾸민 상여 뒤를 많은 사람들이 울며 뒤따르든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무덤을 말함]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소슬바람 불 때. 누가 한잔 먹자할까?
하물며 원숭이가 무덤 위에서 휘파람 불 때, 뉘우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철 1536 - 1593.
자는 계함.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사가 독서하였다. 여러 차례 귀양살이를 하였고, 뒤에 고양시 신원동에 묘를 썼다. 시조와 가사에 뛰어났다.
저작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45~54세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2음보를 1구로 볼 때, 16구의 짧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문학 형태는 가사로 보기도 하나 장형시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이 노래가 이백이 장길에게 술 권하는 것을 모방하고 두보의 시를 취해서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내용은 사람이 한번 죽으면 지게 위에 거적을 씌워 매어가나, 화려한 휘장에 감겨 만인이 울면서 따라가나 무덤에 가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때 가서 뉘우친들 소용없으니 지금 실컷 술을 마시자는 것이다. 애주가이고 호방한 성격을 지닌 작가의 체취가 잘 나타나면서 허무·적막·애수의 정조를 짙게 보여준다. 〈송강가사〉·〈문청공유사〉·〈송강별집추록유사〉와 〈청구영언〉·〈근화악부〉 같은 시조집류에 실려 전한다.
일찌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은 송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다.
“송강 정철은 민속가요(시조나 가사)를 잘 지었다. 특히 그 중에도 <미인곡(美人曲)>과 <권주사(勸酒辭)> 같은 것은 모두 맑고 호장(豪壯)하여 가히 들을만 하다. 비록 당시에 사색 당론에 의해 다른파의 사람들은 그의 노래가 간사하다고 배척하기는 하였으나, 그 문채와 풍류에 있어서는 그대로 넘어갈 수 없어서 가끔 가다가 아깝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제자인 석주(石洲) 권 필(權필)은 신원동에 있는 그의 묘를 지나다가 시를 짓기를
공산에 낙엽지고 가을 비 우수수 지나가는데,
空山木落雨蕭蕭(공산목락우소소)
정승님 풍류, 이제는 간곳 없어라.
相國風流此寂寥(상국풍류차적요)
아,한잔 술 부어가지고 다시 올릴 길 없어,
錙誚一盃更難進(치초일배갱난진)
옛날 권주가가 바로 지금의 노래로구려.
昔年歌曲卽今朝(석년가곡즉금조)
또 두보(杜甫)의 시를 13,000번이나 읽었다고 하는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송강의 <미인곡(美人曲)>을 듣고 감탄한 나머지 칭송의 한 수 짓기를
저, 강 언덕에서 누가 미인곡을 부르는가,
江頭誰唱美人辭(강두수창미인사)
외로운 배 떠나려하자 달은 또 떨어지려 한다.
正是孤舟月落時(정시고주월락시)
아,그리운 우리님. 생각하고 또 생각하니,
逴誚戀君無限意(탁초연군무한의)
이 세상엔 아가씨만이 이 마음을 알고 있구나.
世間惟有女娘知(세간유유녀낭지)
한 잔 먹세그려....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그 송강이 고양시에서 살았고 그 묘가 고양시에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경기 고양시 덕양구 신언동 298-18 송강마을)
석주가 지나다 절을 한 묘는 지금 고양시 신원동(新院洞 : 새원)에 있었다.
본래 송강의 묘는 송강골이라고 하는 곳에 그의 선조와 같은 곳에 묻혀있었는데 송강의 손자가 마침 진천 현감으로 있을 때인 1665년 지금의 진천으로 이장해 간 것이다. 송강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이 신도비의 지명(誌銘)을 썼고 송강사(松江祠) 앞에 세워져 있다.
757 버스 종점에서 의정부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통일로와 마주치는 고가도로 바로 밑으로 개울이 흐르고 그 고가도로 못 미쳐 왼쪽으로 낮으막한 언덕이 솟아있다. 이곳 중턱에 송강의 묘가 있었고 그 아래 송강이 살았던 집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역사의 흐름에도 무심히 자리잡고 있다.
다시 왼쪽으로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 39번 국도변 좁은 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가는 오른쪽에 매우 작은 모습의 묘가 있다. 풀도 제대로 깍이지 않고 버려진 모습을 하고 있는 이곳이 바로 송강이 말년에 아끼던 ‘강아’라는 기생이 누워있는 곳이다. 영감의 묘는 진천으로 옮겨갔지만 이 강아는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강아를 ‘강아 아씨’라고 불러온다. 그 옆의 개울에서 송강이 낛시를 했었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그곳에는 고기를 낚으며 강아를 그리는 송강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송강과 강아의 사랑이야기
전라도의 기녀였던 자미(紫薇)의 원래 이름은 진옥(眞玉)이었으나 정철의 호인 송강(松江)의 '강(江)'자를 따라 강아(江娥)라고 불렸다고 한다. 강아는 시조문학에 있어 '송강첩(松江妾)'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시조 문헌 중에 '누구의 첩'이라고 기록된 것은 오직 강아뿐이다. 대개의 기녀는 속한 지명을 따라 남원명기, 개성기, 평안기 등으로 기명을 적었으나, 강아는 기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송강첩으로 기록되어 있음은 이 여인의 정인(情人)은 세상에 오직 단 한 사람, 정송강뿐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송강이 전라감사로 가 있을 무렵이라니 정철이 48세 전후의 중년시기였던 것 같다.
남원 관아에 자미(紫薇)라는 동기(童妓)가 있었는데 송강이 자미의 ‘머리를 얹어주었다’고 한다.(‘머리를 얹는다’는 것은 옛날 처녀들이 결혼을 하면 긴 머리를 돌돌 말아 머리위에 얹고 풀리지 않도록 비녀를 꽂는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요새는 별로 좋지 않은 용례로 쓰이는 듯 하지만 하여간 여린 새싹같은 어린 童妓 자미로서는 일생의 가장 애틋한 사연) 그리고 송강이 그녀만을 아끼고 사랑하자, 남원 사람들은 그녀를 송강의 이름을 따서 ‘강아(江娥’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꿈같이 아름다운 세월도 잠시, 도승지가 되어 한양으로 전직하게 되자 송강은 자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주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詠紫薇花(영자미화)
一園春色紫薇花 (일원춘색자미화)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纔看佳人勝玉釵 (재간가인승옥채)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莫向長安樓上望 (막향장안누상망) (자미야!)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아라
滿街爭是戀芳華 (만가쟁시연방화)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라
첫사랑은 영원히 잊지 못하는 일인지라, 그렇게 송강이 떠난 후 강아의 송강에 대한 연모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세월은 다시 흘러 8년 후, 강아는 조정의 당쟁에 휘말려 평안도 강계로 귀양 가 있는 송강을 찾아 수천리 길을 달려 다시 만났다. 강계(江界)에서의 송강과 강아의 해후에 관해서는, 한시 화답문(漢詩和答文)이 몇 수 전해오기도 하지만 시조 화답시를 보기로 한다.
잠자리에서 주고받은 시조 화답 시
옥이 옥이라 커 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살 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번옥 : 돌가루를 구워 만든 옥)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憾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코나
내게도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섭철 : 정제되지 않는 철)
위 두 화답시조는 조금 야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살 송곳과 골풀무의 원관념과 언어유희를 감상할 만하다.
정철이 설마 이런 야한 글을 지었을까? 이런 말 있다.
“밤에도 공자(孔子)인줄 아시오?” (공자부인이 이웃 아낙들에게 한 말),
그리고 ‘낮 퇴계’와 ‘밤 퇴계’란 말도 전해온다(퇴계 부인의 말).
임진왜란이 일어난 전쟁과 혼란의 시기에 선조대왕의 특명으로 송강은 다시 복직되어 1592년 7월 전라.충청도 지방의 관찰사로 임명되었고, 강아는 다시 송강을 만나기 위하여 홀홀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님을 찾아 남하하였다. 그러다 왜병에게 붙잡히자 의병장 이량(李亮)의 권유로 자기 몸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을 유혹하여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1593) 송강은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고 남은 여생을 강화도에서 보내다가 (술병으로...) 송정촌에서 죽었다. 선조 26년 계사(癸巳) 12월 18일의 일이었다.
강아는 평생의 정인 정송강을 더 이상 섬길 수 없게 되자, 소심(素心)이란 이름의 여승이 되어 정성껏 송강의 묘를 지키면서 남은 생애를 송강의 모함을 풀고 신원을 복위시키려 온 힘을 쏟았다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소심보살도 죽자, 현재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 인근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묘를 정송강의 묘 곁에 정성껏 모셨다 한다.
* 절주 어명
선조 임금이 술을 좋아하는 송강에게 은으로 된 잔을 하사하면서
공은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만 술을 마시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에 송강은 하인을 시켜 은 술잔을 펴게 하여
세숫대야 만하게 만들어 하루 한 잔의 어명을 지켰다 전하다.
중국에 이백이 있다면 조선에 송강이 있다 해도 무방할 듯하다.
* 秋松江欽慕 我酒哲學(가을날 송강찬미 나의 술 철학)
술의 어원은 수[水]+불[火]
물에 불이 붙었다는 뜻에서 유래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이란 속담이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불분명한 상태
그래 인생 너무 O냐 X로 살지 말자.
흑백논리의 도그마에 빠진다.
자기는 O X가 분명한 사람이다 자랑처럼 말하는
그런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이기 십상이니까.
술을 마시면 너그러워진다.
술꾼치고 악한 사람 없다고들 한다.
술 먹은 개라는 말도 있지만
적당히 즐기면서 마시면 기분이 고양되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풍요로워진다.
현실적 고민도 다 증발해 버리고
천하가 내 것인 것처럼 부자가 된다.
세상이 술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고
한 잔 술에 노래도 한 자리 얼쑤 어깨춤도 으쓱
그렇게 한 세상 살고지고
30년 애첩 담배도 끊은지 십여년인데
반 세기 벗 술 너마저 끊을 수야 !
술아 술아 네가 있어야 시가 있고 풍류가 있다.
술이 있어야 사랑도 있고 님도 있다.
님이여,
당신은 어떤 포도주보다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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